
[주필이 만난 사람]
"연설보다 예술이, 구호보다 행위가 역사를 잇는다"
'님아 그 강을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 속에 한국이 세계인의 일상으로 성큼 들어서고 있다. 세계 시민들은 영화뿐 아니라 영화의 무대가 되는 한국, 한국 문화에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K-영화의 한 중심에는 임권택부터 대한민국 다큐의 신기원을 이룬 진모영까지 남도의 영화인들이 자리하고 있다.진모영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남도의 문화적 DNA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가 한국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인간성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치유의 경험을 모두 가진 나라다. 한국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현실을 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연민과 공동체적 감각을 가장 깊이 간직한 존재다. 한국영화 열풍은 그 이중성과 복합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그 점이 세계가 공감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파동이 엄청나다. 세계가 이토록 한국 영화에 열광하다니 놀랍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성공은 단순한 콘텐츠 산업의 성과가 아니라, 한국의 위상이 어디까지 확장됐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케데헌의 성공은 K-콘텐츠의 확장이라기보다, 한국이 세계 문화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서 새로운 인간의 서사를 제시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한국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나 자본의 힘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인간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치유의 경험을 모두 가진 나라다. 이 모순적이고도 역동적인 서사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한국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현실을 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연민과 공동체적 감각을 가장 깊이 간직한 존재인 것이다. 한국영화 열풍은 그 이중성과 복합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그 점이 세계가 공감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인류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안 간다.
▲우리가 세계 어느 사회보다 인간의 복합적인 조건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세계화, 공동체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극단의 경험을 한 세대 안에서 모두 겪은 나라다. 그 안에는 전근대와 현대, 서구와 아시아, 자본주의의 잔혹함과 인간적 연민이 공존한다. 그렇게 한국 사회는 세계의 축소판이자 실험실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세계에 통하는 이유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삶의 긴장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영화가 세계의 공감을 얻는 것도,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감정의 깊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성장을 위해 '쿼터' 운동을 하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변화가 놀랍다.
▲한국영화의 성장은 제도보다 시대의 열망이 만든 결과다. 스크린쿼터 운동은 문화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당시 창작자들은 자유를 요구했고, 그 자유가 오늘의 다양성과 품격으로 이어졌다. 검열이 사라지고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자 영화는 산업을 넘어 사회의 언어가 됐다. 한국영화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궤를 같이했고, 그 역동성이 지금의 세계적 신뢰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최근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이 다시 주목되는 것 같다.
▲산업의 재편은 위기이자 창작의 기회다. 지금의 혼란은 예술이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관객의 취향이 다변화하고 OTT 등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흥행보다 관계의 예술로 변화하고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은 자본이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다. 관객이 신뢰할 수 있는 작품, 인간의 감정과 시대의 질문이 함께 담긴 영화가 결국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남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필연적 진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워낭소리'가 준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 다큐는 '워낭소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 같다.
▲'워낭소리'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첫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방송 밖에서 제작된 독립 다큐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 최초의 사례이자, 대중적 성공을 보여줬다. 다큐가 사회운동의 언어를 넘어 예술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다. 워낭소리'는 사회파 다큐 세대가 열어놓은 윤리적 기반 위에서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 작품이었다.
-사회파 다큐는 우리 문화사에 중요한 축이다.
▲사회파 다큐멘터리는 사회적 윤리를 예술로 번역한 장르다. 1980년대 '파업전야'를 비롯한 사회파 작품들은 억압된 시대에 인간의 권리와 정의를 외치는 언어였고, 그 연장선에서 1990~2000년대 사회파 다큐 감독들이 사회를 기록했다. 이들은 고통을 감내하며 예술을 사회운동의 한 형태로 실천했다. 다큐멘터리로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 것은 배신처럼 여길 만큼, 진심과 헌신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있었기에 이후 세대가 인간의 존엄과 일상의 품위를 다루는 서정적 다큐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어떻게 제작됐나.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충격과 자신감을 줬다. 당시까지 외주 제작사들은 혼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도 그 작품은 방송국 소유였다. 소위 독립피디들은 방송국 소모품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길로 뛰쳐나와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당시 한국 다큐는 해외 피칭(Pitching. 투자 유치, 선판매 등을 목적으로 제작사, 투자사 등에게 하는 일종의 투자 설명회)과 국제영화제를 통해 제작비를 확보해야 하는 열악했던 상황이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준비하면서 해외 펀딩을 계획하고, 세계무대를 겨냥했다. 덴마크 공영방송 DR TV의 제작 지원으로 작업을 추진했다.

-국내 제작지원은 어땠나.
▲국제 피칭과 해외 펀드가 중심인 상황에서 국내 영화제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후 방송콘텐츠진흥재단(BCPF),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명그룹 등 국내 주요 영화제와 기관, 투자사들이 함께 했다. 핵심은 창작자들의 네트워크와 실험정신이다. 한국 다큐의 성장은 국가보다 창작자들의 연대가 만든 결과다.
-광주 영화산업 지원현황은 어떤가.
▲광주의 영화지원 체계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원의 초점이 창작 생태계보다는 단기적 행사와 행정 성과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민선 8기 들어 영화산업의 중추가 될 '광주영화위원회'가 출범을 앞두고 돌연 폐기됐다. 가장 뼈아픈 퇴행이다. 수년간 지역 영화인과 전문가들이 논의해 온 제도적 기반을 행정이 정치적 이유로 없애버린 것은 창작 생태계에 대한 불신이자, 문화자치의 의지 부재다. 영화위원회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광주가 문화산업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보여주기식 지원과 단기적 홍보 사업에서 벗어나 장기적 제작 지원·인력 양성·배급 시스템 등 실질적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는.
-'님아∼'는 480만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다큐의 신화로 꼽힌다. 그 압도적인 공감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공감의 영역은 층위가 다양해 단순하게 말하기 쉽지 않다. 처음 백만을 넘고 400만을 넘어 480만에 이르는데 한 달 반 만에 이뤄졌다. 사실 감이 오지 않았다. 놀라운 마음으로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많은 예술 영역이 그렇지만 영화 부문도 지역 출신이 두드러진다. 임권택, 김한민, 이충렬 등등,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왔다.
▲남도는 한국 예술정신의 원형이 살아 있는 곳이다. 현실의 어둠을 응시하면서도 인간의 품격과 감정을 놓지 않는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민족의 서사를 복원했다면, 김한민 감독은 역사적 비극을 대중의 서사로 끌어올렸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일상을 품위와 예술로 바꾸었고, 나 역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온도를 기록하려 한다. 남도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감정의 깊이가 있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공감과 품위의 미학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남도의 감각, 문화적 DNA가 있는 것 같다.
▲전라도 사람들은 자연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타자에 대한 예의가 몸에 배어 있다. 그건 단순히 착하다는 게 아니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무언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그런 마음. 그게 이 지역의 문화적 DNA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 지역에는 독특한 정의감이 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 그런데 그 정의감이 공격적으로 폭발하기보다는 예술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전라도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예술은 늘 사람 냄새가 난다. 그게 남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온 경험이 이 지역의 예술을 만들어온 거다.
"'새벽광장'은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한 윤상원 열사의 유훈을 잇는, 1980년 5월의 마지막 새벽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는 시민 예술 프로젝트다. 그날의 새벽을 '승리의 시간'으로 재해석하자는 취지다. '그날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새벽에 함께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새벽광장은 기억을 애도의 공간에서 공동체적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 말씀하신 데로 '명랑'에서 보듯 저 임진왜란에서 구한말 의병, 5·18에 이르기까지 늘 시대와 함께했다.
▲남도에는 여전히 서로를 품는 감정의 질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이자 감응의 문화다. 타인의 아픔을 제 일처럼 여기는 공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겸허, 그리고 슬픔을 존엄으로 바꾸는 힘이 남도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이 감각은 단절과 냉소의 시대에 인간 사이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문화적 해독제일 수 있다고 본다. 남도는 과거의 저항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치유하는 정서적 자산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귀향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
▲강원도로 경상도로 촬영을 다니면서 어느 날 문득, 깨달음처럼 질문이 제기됐다. '가장 원형적이고 풍부한 고향(그는 전남 해남서 나고 자라, 고교와 대학을 광주에서 나왔다)을 두고 뭐 하고 있나'라는 질문이다. 바로 짐을 쌌다. 어쩌면 조심스러웠고, 말할 수 없는 무게감에 선뜻 다가오지 못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의 공동대표를 맡고 계시다.
▲놀이패 '신명'이 5·27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한 윤상원 열사의 유훈을 잇는 새벽 '제(祭)를 지내오고 있었다. 감동적이었지만 승리를 기억하기에는 제가 너무 단출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예술인들과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을 만들어 이태째 진행했다. '새벽광장'은 1980년 5월의 마지막 새벽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려는 시민 예술 프로젝트다. 광주항쟁이 패배의 기억으로만 남지 않도록, 그날의 새벽을 '승리의 시간'으로 재해석하자는 취지다. '우리는 패배한 도시가 아니라, 끝까지 버틴 승리한 시민이다"는 정신을 담아 명칭도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으로 명명했다. 5월 26일 자정부터 27일 새벽까지 24시간 동안 광장 곳곳에서 연극, 마당극, 음악, 캘리그래피, 낭독, 시민참여 공연이 이어진다.
연설보다 예술이, 구호보다 행위가 역사를 잇는다. '그날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새벽에 함께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새벽광장은 기억을 애도의 공간에서 공동체적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차기작이 궁금하다.
▲준비 중인 작업은 5·18의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품이다. 이름 없는 시민과 생존자, 유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해 '기억의 윤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5·18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름 없는 시민과 생존자, 유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해 '기억의 윤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1980년 당시 5월27일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시민군 중 김동수 열사의 경우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안고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김동수 열사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마고 있다. 그의 부친은 6·25 때 조부모가 국군 양민학살로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평생 심신의 상처에 시달리다 아들까지 1980년 앗겼다. 열사의 고향인 장성 서삼면 부친의 쌀 창고를 기념 갤러리로 조성하는 등 그를 기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추모관이 아니라 '광주의 마지막 새벽을 지킨 이들의 기록을 예술로 복원하는 장소'로 계획되고 있다. 그의 가족사와 도청 최후 항전의 이야기를 통해 '패배가 아닌 인간 존엄의 기록'을 복원하고자 한다.
진모영은
예술로 인간을 기록하다 …다큐의 윤리에서 광주의 새벽까지
진모영 감독은 인간의 존엄과 관계의 품격을 기록해온 한국 다큐멘터리의 대표적 영화인이다. 전남 해남 태생으로 전남대 법학과 재학 시절 '시대의 부름'에 기꺼이 투신했다. 방송사와 독립제작사에서 PD·카메라맨으로 활동하며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영향으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대표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는 76년을 함께한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작품으로, 국내 다큐멘터리 역사를 갈아치웠다.

'님아∼'는 덴마크 공영방송 DR TV가 제작 지원, 프랑스 캣앤독스(CAT&Docs)가 해외 배급으로 국제 신뢰를 확보했다.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EBS국제다큐영화제(EIDF) 등 국내 주요 영화제들이 후반 작업비와 마케팅을 지원했다. 이같은 제작 과정으로 '님아∼'는 한국 다큐멘터리가 국제공동제작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가 됐다. 또 제21회 로스앤젤레스영화제 다큐멘터리부문 대상, 2015 밀레니엄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등 국내외 영화제 수상 기록을 달성하고, 20여 개 영화제 초청, 480만 관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21년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가 190개국에 방영됐다
그의 작업은 늘 "예술은 싸움이 아니라 품격의 언어"라는 철학 위에 있다. 최근에는 광주로 돌아와 5·18의 기억을 예술로 되살리는 시민 프로젝트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 의 공동대표를 맡아, 예술과 공동체가 함께 기억을 치유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영화와 행보는 다큐멘터리를 넘어, 예술이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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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이 일군 ‘대동문화’, 지역 유산으로 계승”
조상열 광주대동문화재단 대표 조상열 대표는 지역의 유일한 민간 문화잡지 ‘대동문화’를 태동부터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잡지 대표이자, 지역 전통문화지킴이, 인문학 강사로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주필이 만난 사람]한류가 세계의 언어가 됐다. 그 성취는 기술이나 속도, 유행이 아니라 축적, 전통의 유니크함에서 비롯된다. ‘대동문화’는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현장에서 길어 올려, 잡지와 답사, 강연으로 이어온 시민 문화의 실험장이었다. 1990년대 답사 자료집에서 출발해, 지역 문화잡지의 명맥을 30년 가까이 이어온 이 기록은 행정이나 자본이 아닌 시민 메세나의 힘으로 일궈졌다. 메세나 그룹 대동문화재단 운영이사회, 이름 없는 전국 후원자들의 연대는 문화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동문화’를 태동부터 이끌고 있는 조상열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전 세계적으로 한류가 대세다. 저력이 무엇이라고 보는지.▲한류의 저력은 새로움이나 기술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삶의 방식과 정서에 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AI가 일상을 지배해도 문화의 중심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온 역사와 기억, 공동체의 경험, 전통이 힘을 만든다. 한류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유행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온 전통과 생활문화가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결과다.-서양, 일본 등을 쫒던 국민들이 마침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된 것 같다. 각별하실 것 같다.▲우리 사회는 서구와 일본을 기준으로 살아온 점이 있다. 전통은 낡았다는 반응이 돌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감회가 크다. 다만 자부심이 일시적 유행으로 소비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좋아한다’를 넘어서 왜 소중한지 이해하고 지켜내려는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대동문화’는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지역의 중요 거점이다. ‘대동문화’를 설명해달라.▲‘대동문화’는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현장에서 발굴하고, 이를 잡지와 답사, 강연으로 풀어내는 문화공동체라 할 수 있다.특정 개인이나 기관이 아니라, 시민의 참여와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고 자랑이다. 광주를 거점으로 전국과 세계를 향하고, 전통을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자산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민간에서 문화잡지를 운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시작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90년대 중반, 한문학원 강사들과 함께 전라도 역사탐방을 하며 운영한 답사 자료집이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001년에 지역의 유일한 문화잡지로, 금호 그룹이 운영하던 ‘금호문화’가 22년 만에 폐간되고 언론사가 운영하던 ‘예향’까지 중단되자 지역 원로 언론인과 문화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됐다. ‘금호문화’ 폐간 이듬해에 대동문화가 문화잡지 형태로 본격 출범했다.-역사 탐방에서 시작됐다는 게 이채롭다.▲당시 한문학원이 번성하던 시절인데 강사들의 역량 강화가 절실했다. 한문은 글자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고전의 정신을 삶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제자·후배들이 각 지역에 학원을 차리면서 역량강화로 매달 공부를 하던 중 책상머리를 벗어나 ‘현장’을 찾아 나서게 됐다. 그렇게 소쇄원·낙안읍성 등으로 답사를 다니며 답사 자료집을 발간한 것이 지역사회의 관심을 끈 것이다.조상열 대동문화회장이 26일 광 조상열 대표는 지역의 유일한 민간 문화잡지 ‘대동문화’를 태동부터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잡지 대표이자, 지역 전통문화지킴이, 인문학 강사로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민간에서 문화잡지를 운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많은 분들이 도움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경영의 숨통을 틔워준 건 현대그룹 연수 사업이었다. 대통문화 역사탐방이 소문이 났던지 현대그룹 본사에서 ‘전라도 답사 연수’를 요청했다.2001년 첫 회의 참여자들 만족도가 최고점을 기록하며 그룹의 성공사례가 돼 전 계열사로 확산됐다. 14년을 성공적으로 내달렸는데 세월호 참사로 잠정 중단하면서 끝이 나벼렸다. 그 기간 현대그룹 광고까지 더해지면서 발간 체계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기반이 됐다. 이후 현대는 물론 여타 기업의 인문강의 요청이 이어지며 대동문화가 전국으로 뻗어나갔다.-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듯하다.▲그렇다. 광주의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와 시민들의 참여와 도움, 지원이 생명이다. 어느 날 김양균 전 헌법재판관님이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셔서 “이 귀한 걸 시민들이 하느냐, 내가 100만 원씩 내는 사람 50명을 만들겠다”고 제안하시고 실재로 55명의 운영이사회를 이끄셔서 2007년 3월 무등산관광호텔에서 운영이사회가 출범했다. 이 후원을 기점으로 계간지였던 ‘대동문화’가 격월 체제로 끌어올려졌고, 대동문화의 핵심 자원이 됐다. 지금은 약 250명 규모로 확장됐다. 이밖에도 전 광주라마다 김대원 회장께서 수년 동안 사무실을 무상지원하는 등 많은 지역사회의 도움이 이어져 왔다. 시민후원과 출판사업, 광고 등이 주 수입원이라고 이해하시면 된다.-전국 유일의 시민 메세나로 만들어지는 문화잡지로 기록돼야 할 것 같다. 시민들과 접촉면 확장이 중요해 보인다.▲대동문화는 말 그대로 시민 후원으로 운영된다. 다만 지금까지는 대부분이 중장년 이상 세대로 전승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젊은 세대 유입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대학생 문화유산지킴이 장학생 제도를 도입했다. 참여대학생 중심으로 미래인재·청년부 준비모임’이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이 장학금 역시 시민후원으로 전개된다.-‘대동 전통문화 대상’은 많은 상금 액수로 민간단위 수상이라고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대동문화가 소개하던 한옥 장인 등 ‘한 우물’ 파는 사람들의 삶을 보며, 이들을 직접 격려하는 상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2019년에 제가 1천만 원을 내겠다고 하자 당시 3대 김기수 이사장께서도 기꺼이 1천만원을 후원해주는 등 많은 분들의 후원이 이어졌다. 관(시·문체부) 지원은 시류에 따라 중단될 수 있어, 뜻있는 사람들이 기부로 모금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해 모금이 약 6천만 원, 상금은 총 2천500만 원 규모로 시작했다. 지금은 상금이 3천만원이다. 한번 시상식마다 약 7천만원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 모든 것을 지역사회 후원으로 운영하고 있다.-대동문화재단이 하는 일들을 설명해달라.▲재단은 잡지 발간을 넘어 ‘현장 기반 문화사업’을 여러 축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현재 문화재 돌봄센터(국가유산청·문화재청 및 광주시 위탁)와, 충장202센터·사직골문화센터·효천문화센터 등 지자체 위탁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위탁사업은 100% 일자리 창출 사업이다. 그밖에 문화재청의 문화재지킴이 사업, 문체부 인문스토리 사업 등 보조사업 들을 수행해오고 있다.-회장님 개인사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앞서 오지호 선생님과 인연을 말씀하셨는데.▲오지호 선생은 내 삶의 방향을 정해준 정신적 스승이다. 학문 이전에 문화와 민족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인식, 그리고 지식은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그분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한문학원 운영도 이채롭다.▲오지호 선생님께서 운영하던 한문학원 문하생으로 인생을 출발했다. 이후 성장해서 독립학원을 운영한 것이다. 한문학원은 글자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과정이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이 경험이 이후 답사와 해설, 문화 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앞으로 꼭 남기고 싶은 일이 있다면▲특정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지역에서 문화가 스스로 숨 쉬는 구조를 남기고 싶다. 누군가의 이름보다 시민의 기억 속에 남는 문화, 그것이 내가 바라는 마지막 과제다.조덕진기자 mdeung@mdilbo.com
- · "지워진 존재를 다시 세우는 일··· 장애 예술, 존엄을 피워내다"
- · "정직함으로··· 광주 스토리 담고, 전국 브랜드로 키울 터"
- · "기후 위기에 자연 회복력이 더욱 중요···'삼인동 숲'이 산 증인"
- · 존엄과 관계 속에 삶의 질을 유지하는 '거룩한 노화' 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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