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대만 작가 5개 팀 참여
국가적 아픔·환경·퀴어 등 주제
영상·설치·사운드 통해 메시지
강수지·이하영 작가 작품 눈길
‘덕질’로 2030 여성 연대 조명

지난 2024년 겨울,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각양각색의 응원봉들은 2030 여성들이 광장으로 들고 나온 새로운 ‘저항의 도구’였다. ‘덕질’의 아이콘이었던 콘서트용 응원봉의 등장은 ‘비폭력’과 ‘연대’를 상징하는 강력한 메신저로서 빠르게 자리매김됐다.
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하는 마음, 즉 ‘덕질’의 에너지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연대의 동력으로 변모했는지를 주목한 전시가 광주에서 열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전당장 김상욱)이 내달 29일까지 복합전시5관에서 선보이는 ‘ACC NEXT 아시아 신진 작가전’은 아시아 예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작가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실험적인 감각을 한데 모았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강수지·이하영 작가의 ‘민주주의 덕질하기’다. 이들은 12·3 불법계엄 당시 광장에서 목격한 독특한 풍경에 주목해 흔히 ‘팬덤 문화’로 치부되던 덕질의 행위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 참여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는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전시장 내부에 가상의 아이돌 그룹 ‘키세스’의 멤버 ‘민주’와 ‘주의’를 위한 ‘생일 카페(생카)’를 차렸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꾸려진 이 ‘생카’ 현장에는 팬덤 활동에서 빠질 수 없는 창작 소설(팬픽)과 컵홀더, 포카홀더 등 다양한 굿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특히 아이돌 그룹명인 ‘키세스’는 실제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집회를 열었던 이른바 ‘키세스 시위대’의 명칭을 가져와 의미를 더했다.
이하영 작가는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온 또래 여성들을 보며, 이들이 어떻게 연대의 감각을 익혔을까 고민했다”며 “덕질은 흔히 평가절하 당하는 행위지만, 사실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한 일념으로 광장으로 향했던 응원봉 세대의 마음이 이 가상의 공간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치환되는 셈이다.

이들의 또 다른 작품 ‘독버섯’은 저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작가들은 제주 4·3, 여순 10·19, 5·18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사회 위협 요소인 ‘독버섯’으로 규정하며 침묵을 강요해온 지배 이데올로기에 주목했다. 오히려 독버섯을 망각에 맞서는 저항의 도구로 재정의하고, 이를 배양하는 공간으로 패스트푸드점을 설정했다.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의 책장에 꽂혀 있던 ‘불온 서적’을 매개로 버섯을 키워내고, 현대 사회의 가장 빠른 확산 매체인 ‘배달’ 시스템을 통해 저항의 메시지를 사회 곳곳으로 유통하겠다는 의도다.
이주연 작가는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노동과 신체의 흔적을 추적한다. 비디오 작품 ‘언더 그라운드’는 실제 터널 현장에서 지질 기사로 일하는 작가의 아버지를 통해 난청이라는 감각의 상실을 탐구한다. 관람객은 오디오 믹싱을 통해 보청기를 꼈을 때의 불편함이나 난청인의 청각 환경을 직접 경험하며 보이지 않는 노동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또한 ‘헤비 웨더’에서는 한강 변의 낚시꾼들과 사라진 반도체 공장 여공들의 흔적을 공포 영화적 문법으로 엮어내며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한다.

중국 출신의 유얀 왕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디지털 환경을 날씨에 비유한다. SNS에서 무작위로 수집한 이미지들을 수직으로 분절하고 재조립한 영상 작품 ‘웨더’는 더 이상 우리가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몰입감을 주는 주황빛 공간은 데이터가 개인의 감정과 인식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시마 작가는 전통 서사와 무속적 상상력을 빌려 퀴어 담론과 소외된 개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품 중 한강 위에 떠 있는 부표에 올라타려 애쓰는 퍼포먼스 영상 ‘dir’은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기준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소수자들의 처절한 생존 노력을 상징한다. 특히 실제 정신과 처방을 받은 약봉지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 생존의 무게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대만의 치우 즈 옌은 국가적 트라우마인 2·28 사건의 기억을 다룬다. 작품 ‘만델라 메모리’는 집단적 기억의 오류를 뜻하는 ‘만델라 효과’에서 착안해 공식 기록이 부재한 역사적 공백을 개인의 증언과 허구적 서사로 재구성한다. 관람객이 거울로 된 건물을 통해 좌우가 반전된 자막을 읽어야 하는 구조는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개인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김상욱 ACC 전당장은 “이번 전시는 새로운 세대의 미학적 실천이 아시아를 넘어 어떤 궤적을 그릴지 가늠하는 출발점”이라며 “신진 작가들의 실험과 교류를 통해 아시아 예술의 미래를 함께 상상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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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닐·캡모자·부채···ACC 콘텐츠 상품 '인기'
ACC 문화상품점 ‘들락(DLAC)’. ACC 재단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ACC재단·사장 김명규)의 문화상품점 ‘들락(DLAC)’이 개점 이후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며 연 매출 3억원을 넘어섰다. 문화 콘텐츠를 일상 속 상품으로 풀어내는 전략이 성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27일 ACC 재단에 따르면 들락은 2023년 6월 개점 이후 매년 1억원 안팎의 매출 증가를 기록했다.개점 첫해인 2023년 매출은 8천600만원으로 당시 개발된 문화상품은 33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4년에는 상품 개발 종수가 112종으로 늘어나며 매출이 2억2천만원으로 급증했고, 2025년에는 122종의 상품을 선보이며 연매출 3억3천만원을 기록했다. 문화상품이 기념품을 넘어 ACC 브랜드와 콘텐츠를 확장하는 주요 접점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ACC 문화상품점 ‘들락’에서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ACC 콘텐츠 상품들.ACC 광장 옆에 자리 잡은 들락(DLAC)은 ‘Dots and Lines to Asian Culture’의 약자로, 서로 다른 점들이 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문화적 맥락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과 예술, 콘텐츠와 일상이 점으로 찍힌 뒤 상품이라는 선을 통해 연결되듯, 아시아 문화예술의 다양한 이야기가 소비자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기를 바라는 기획 의도가 반영된 공간이다.지난해 들락에서 판매된 문화상품은 ACC 기관 상품, ACC 콘텐츠 상품, ACC 디자인(BI) 상품 등으로 구성됐으며, 이 중 ACC의 전시와 연구 성과를 직접적으로 반영한 콘텐츠 상품들이 특히 관심을 받았다.ACC 문화상품점 ‘들락’ 전경.들락의 콘텐츠 상품은 전시 기획 단계부터 함께 구상된다. 매년 초 전시기획과와 협의를 거쳐 연간 전시 일정과 주요 기획을 공유하고, 그중 상품으로 확장할 전시를 선별하는 방식이다. 이후 전시 콘셉트에 맞는 상품군을 제안하면 전시기획과가 참여 작가들과 내부 논의를 통해 어떤 작품을 어떤 디자인으로 구현할지 최종 결정한다. 전시의 메시지와 작가의 작업 세계가 상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획 단계부터 조율하는 구조다.27일 찾은 ACC 문화상품점 ‘들락’. 판매 중인 문화상품들이 진열돼있다.ACC 재단의 상품 판매량 집계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ACC 콘텐츠 상품 가운데 판매 상위권에 오른 제품은 ‘아시아 사운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바이닐 음반과 료지 이케다 전시 연계 상품인 SAN SAN GEAR 협업 모자, 그리고 ‘애호가 편지’ 전시에서 파생된 한지 부채인 것으로 나타났다.‘아시아 사운드 아카이브’ 바이닐은 1970년대 한국 재즈 아티스트들이 예견했던 한국적 사운드를 출발점으로 한다. 1960~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어법과 신민요, 전통 장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악을 담았으며 500매 한정 제작으로 기록성과 소장 가치를 동시에 갖췄다.일본 작가 료지 이케다의 전시와 협업한 SAN SAN GEAR 모자는 전시 타이포그래피와 ‘data.gram series’ 작품을 그래픽 요소로 재구성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패션 아이템으로 번역해 전시 관람 이후에도 작품의 이미지를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애호가 편지’ 전시를 바탕으로 제작된 한지 부채는 남원에서 50년 이상 부채를 만들어온 최수봉 장인이 손잡이와 부챗살을 직접 다듬어 완성도를 높였다. 한지에는 판화 기법 가운데 하나인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전시를 상징하는 무궁화와 장미 이미지를 인쇄해 전시의 아련한 감성을 생활 소품에 담아냈다.27일 찾은 ACC 문화상품점 ‘들락’에 진열돼있는 ACC 콘텐츠 상품 ‘아시아 사운드 아카이브’ 바이닐.ACC 디자인(BI)을 중심으로 한 들락 자체 브랜드 상품도 안정적인 수요를 유지하고 있다. 들락 양우산과 니트 블랭킷, 수건 등은 ACC 방문 경험을 일상으로 이어주는 생활형 상품으로 자리 잡으며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다.ACC재단은 올해 상반기 50여 종의 신규 문화상품을 추가로 선보일 계획이다. 캘린더 스티커와 양말, 만년일력 등 생활 밀착형 상품과 함께 티셔츠, 큐브 메모지, 렌티큘러 엽서 등 콘텐츠 연계 상품을 확대할 방침이다.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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