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1세대로 해외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했던 영암 출신 김사옥(1873~1945)이 미국 캘리포니아 리들리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미주 한인사회단체 간부로 활동하며 독립자금을 모으고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주 독립운동은 이승만, 안창호 등 지도자 중심으로 조명되다 보니 농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독립자금을 꾸준히 제공한 평범한 인물들의 선양작업은 저조한 실정이다. 보훈당국과 지방자치단체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들의 존재와 활동상황을 파악, 잊혀진 이름을 복원해야할 숙제와 마주하게 됐다.
2029 광주학생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미주 독립운동 조사에 나선 초당대학교 박해현교수팀은 지난 7월27일부터 8월초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리들리 시립묘지에서 김사옥의 묘비를 찾아냈다. 그의 묘비는 한자로 ‘대한인 김사옥((大韓人 金士玉)’으로 기록돼 죽을때까지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있다. 김사옥의 묘비옆에는 또 다른 7명(김기수·박군보·한기수·차정율·이원봉·장석일·장봉선)의 한인 독립운동 참여자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사단은 이들의 묘비에서 이름, 생몰 연도를 확인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인구조사부 기록을 대조하고 당시 미주에서 발행된 ‘공립신문’과 ‘신한민보’에서독립자금 모금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한 내용을 확인했다.
한인들은 1900년대 초반 하와이 이주민들이 미국 중부의 곡창지대인 리들리에 정착해 주로 농장에서 일했고, 교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결성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모금하고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특히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후 이름없는 이민 노동자들이 농장서 힘들게 번 돈을 지속해서 독립자금으로 내고 단체를 꾸려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뤘다.
이번 모비에서 확인된 영암출신 김사옥은 대한인국민회 세브란시스코 지방회원으로 활동하며 국민의무금, 독립의연금, 본국 수재의연금 등 각종 납부와 모금을 통해 동포구제사업과 조국 독립을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다.
재미·재멕시코 동포의 인구 등록작업은 1919년 3.1운동이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후원 활성화를 위해 실시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인국민회에 재정징수를 위임해 동포들은 인구세 납부를 통해 독립운동 재정에 일조를 기했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자금 모금과 지원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잔디 걷어내자 나타난 대한인··· 태평양 건넌 광주의 불꽃]
미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 1. 리들리 시립묘지
( *편집자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관장 김수정)은 지난해부터 광주학생운동 참여자 조사 및 참가학교 자료 수집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용역 책임을 맡고 있는 초당대학교 박해현 교수가 지난 7월 말 미주 현지를 다녀왔다. 박 교수는 전라남도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사업을 주관하였고, 현재는 전남독립운동사 편찬 책임을 맡고 있다.)
LA와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우리에게 낯선 캘리포니아 중부의 작은 농업도시 리들리를 답사지에 포함했다. 1903년 하와이 이민단 제1진의 단장이자 통역이었던 목포 출신 정인수의 흔적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2023년 전라남도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에서 그의 포상신청서를 작성했고, 정인수는 2025년 순국선열의 날 정부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리들리 한인이민역사기념각 어디에도 정인수의 이름은 없었다. 하와이 묘지에 안장된 그를 리들리 기념각의 인물로 잘못 소개한 정보가 반복돼 전해진 것이었다. 문헌과 인터넷 검색만으로 걸러내기 어려웠던 오류를 현장이 바로잡아 준 셈이다.
그럼에도 리들리는 반드시 살펴야 할 곳이었다. 리들리와 프레즈노 일대는 20세기 초 한인들이 농장 노동을 찾아 정착한 중가주의 중심지였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온 한인들은 포도와 오렌지 농장의 고된 노동을 견뎠다. 동포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은 교회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요한 독립 자금으로 전달되었다. 중가주 한인사회는 미주 지역과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특히 광복군의 든든한 경제적 후방 기지였다.
◆광주에서 타오른 불길, 태평양을 건너다
특히 1929년 11월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태평양 건너 미주 한인사회를 크게 움직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주 한인사회는 이를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니라 국내에서 다시 타오른 민족독립운동으로 받아들였다.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 독립운동 세력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국내 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데 적극 나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지역과 노선에 따라 흩어져 있던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역량을 다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국내 학생들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독립성금도 크게 증가했다.
리들리와 프레즈노의 한인들도 이러한 흐름에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농장에서 고된 노동으로 번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성금으로 내놓았던 이들의 이름이 신한민보와 대한인국민회 자료 곳곳에 남아 있다. 따라서 이번 현지조사는 1929년 광주에서 타오른 학생들의 항일정신이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미주 한인사회와 만났고, 그것이 다시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과 독립운동자금으로 이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연결의 한 축에 리들리와 프레즈노 한인사회가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대한인(大韓人)’
지난 7월 29일 오후 6시 무렵 리들리 시립묘지에 도착했다. 사전에 확보한 묘지 번호도 없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광주학생운동 참가학교 조사단’은 묘비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때 유난히 큰 묘비 한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자가 필자의 시선을 붙잡았다. ‘大韓人金士玉之墓.’ ‘대한인 김사옥의 묘’였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김사옥은 1873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필자는 2023년 전라남도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을 수행하면서 그의 포상신청서를 직접 작성했다.
신문기사와 독립운동 성금 기록에서만 접했던 인물이 태평양 건너 낯선 묘역에 잠들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슴을 울린 것은 ‘大韓人’ 세 글자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 머나먼 이국땅에서 삶을 마친 한 사람이 자신의 묘비에 남긴 자기소개였다. 국적이나 출신지역보다 자신이 ‘대한의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 ‘大韓人’에는 타국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첫날 조사를 중단했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30분을 달려 묘지로 향했다. 전날의 우연한 만남을 우연으로 끝낼 수 없었다.

◆잔디를 걷어내자 나타난 이름들
리들리시 관계자에게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를 찾는다고 설명하자 그는 독립문 모양의 한인이민역사기념각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안창호·이승만·윤병구·김종림·김호·김형순·한시대·송철·김용중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공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려는 사람들은 그곳에 없었다. 인근 묘지에 잠들어 있으면서 아직 정부 포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한인 묘역으로 추정되는 구역의 상당수 묘비는 세워진 비석이 아니라 잔디와 같은 높이의 평장이었다. 오랜 세월 흙과 잔디에 덮여 있어 묘비가 있다는 사실조차 쉽게 알아보기 어려웠다. 뜨거운 햇볕 아래 묘비를 한 기씩 확인했다. 흙과 잔디를 손으로 걷어내고 글자를 닦아야 이름과 생몰연대가 나타났다. 눈에 익은 성씨가 보이면 현장에서 곧바로 신한민보와 대한인국민회 자료, 성금 명단을 대조했다.
그렇게 김사옥에 이어 김기수·박군보·한기수·차정율·이원봉·장석일·장봉선의 묘소까지 모두 8명을 확인했다. 장석일과 장봉선의 묘소를 함께 확인하면서 두 사람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특히 장봉선은 대한여자애국단 중가주 지부에서 활동했다. 이 단체의 여성들은 빠듯한 생활비를 아껴 독립운동자금과 동포 구제금을 마련하고 여성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웠다.
장석일·장봉선 부부의 묘소는 남성 지도자 중심으로 서술돼 온 미주 독립운동사의 뒤편에 여성과 가족, 공동체의 지속적인 실천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기수는 프레즈노 지역에서 경찰로 근무하면서 한인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기사 한 줄, 몇 달러의 성금, 지역단체 임원 기록 등으로 이름이 흩어져 있었다. 묘비의 생몰연대와 가족관계를 신문 및 단체자료와 맞추자 기록 속 이름들이 구체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8명 모두 아직 ‘미서훈’
현장에서 확인한 여덟 명은 모두 아직 정부 포상을 받지 못한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이다.
이 가운데 김사옥은 필자가 2023년 포상신청서를 작성해 정부에 포상을 신청한 상태이며, 나머지 인물들은 앞으로 공적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묘소를 발견했다는 감격이 곧바로 독립운동 공적의 확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뜻밖인 것은 답사 전 국내 자료를 통해 찾아보려 했던 30여 명의 묘소는 한 기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부는 광복 후 국내로 봉환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영문 표기와 이명, 부부 합장, 묘역 이동과 무표석 묘 등 여러 가능성이 남아 있다. 알고 찾아간 사람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여덟 명을 새로 만난 셈이다.
이 경험은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이 문헌조사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한민보의 성금 기록만으로는 동명이인을 가려내기 어렵다. 실제 인물을 특정하려면 생몰연대와 거주지, 직업, 가족관계가 필요하다. 반대로 묘비만으로 독립운동 공적을 알 수도 없다. 신문과 단체자료, 묘지대장과 매장구역도, 묘비와 후손의 증언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생애와 공적이 복원된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만난 김용선 지사의 손녀 아만다 메이 김(프레즈노 대학 강사)을 통해서는 김용선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자녀들을 홀로 길러낸 부인 김혜련도 리들리 묘지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이틀 동안 묘역을 누볐지만 김혜련의 묘소를 찾지 못했다. LA에서 안창호 선생의 외손 인터뷰할 때 느꼈지만, 가족과 공동체를 지탱하고자 한 여성의 삶도 독립운동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았다.

◆아직 우리가 부르지 못한 ‘대한인’
이번 조사는 성과가 있었지만 분명 미완이다. 앞으로 리들리시의 묘지대장과 매장구역도를 확보하고 한인 안장자들의 영문명·한자명·이명을 대조해야 한다. 국내 봉환과 이장 여부, 후손들이 간직한 문서와 구술도 확인해야 한다.
리들리 묘지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여덟 명을 찾았다’는 성과보다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확인하지 못한 묘소와 읽히지 않는 이름, 아직 포상받지 못한 활동가들은 미주 독립운동사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사옥의 묘비에 새겨진 ‘大韓人’ 세 글자는 그 미완의 역사를 다시 마주하라는 요청처럼 느껴졌다.
1929년 광주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의 불길은 광주에 머물지 않았다. 전국으로 번졌고, 태평양을 건너 미주 한인사회를 다시 움직였다. 머나먼 타국의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모으고 독립운동의 대열에 힘을 보탰다. 그 역사적 흐름의 한편에 리들리와 프레즈노의 한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한 세기가 흐른 오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태평양을 건너간 조사단이 리들리의 잔디 아래에서 다시 그들의 이름을 만났다. 리들리, LA, 하와이의 잔디 아래에는 아직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대한인’이 잠들어 있다.
그 잊힌 이름을 찾아내고 흩어진 기록을 모아 그들의 삶과 공적을 역사 속에 되돌려 놓는 일. 광복 81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며,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찾아온 필자에게도 계속돼야 할 소명이다.
박해현 초당대 교수(초당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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