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시즌예술단 첫 프로젝트
'수궁가' 판타지 음악극 재해석
검은 토끼 '까미' 통해 용기 전달
어린이 연계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 어린이극장 최초 장기 공연을 통해 공연과 교육을 결합한 새로운 어린이 예술 모델을 선보인다.
올해 처음 출범한 ACC 어린이극장 시즌예술단의 첫 프로젝트인 어린이 음악극 ‘블랙 래빗: 검은 토끼의 용감한 여행’이 오는 9월 4일부터 27일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블랙 래빗: 검은 토끼의 용감한 여행’은 판소리 ‘수궁가’를 현대적인 판타지 음악극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전래동화 속 익숙한 이야기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 어린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우리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야기는 토끼마을에서 유일하게 검은 털을 가진 토끼 ‘까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받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까미는 어느 날 마을을 뒤덮은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로 토끼들이 하나둘 병들기 시작하자, 모두를 구하기 위해 깊은 바닷속 왕국 수궁으로 향한다.
여정 속에서 까미는 자라 왕자, 반딧불 요정, 고래 할머니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화려하지만 수상한 수궁과 그림자 괴물의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병든 마을을 구할 수 있는 힘이 정말 용왕의 수염에 있는지, 그리고 세상을 위협하는 검은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지 밝혀가는 과정은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우정, 자기 존중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공연은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중심에 둔다. 검은 털 때문에 소외됐던 까미가 결국 누구보다 큰 용기를 발휘해 모두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어린이들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무대는 국악과 뮤지컬을 결합한 8개의 음악 넘버와 역동적인 군무로 꾸며진다. 전통 장단과 현대적인 뮤지컬 음악이 어우러져 귀를 사로잡고,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와 화려한 안무가 판타지 세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연에 몰입할 수 있는 가족 음악극으로 어린이뿐 아니라 부모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무엇보다 올해 시범 운영을 시작한 ACC 어린이극장 시즌예술단의 첫 번째 기획 상설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수한 어린이 공연을 제작하고 젊은 예술인을 발굴·육성하기 위해 창단된 시즌예술단은 공연과 예술교육을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해 어린이 공연 생태계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블랙 래빗’은 최해주 예술감독이 작·연출을 맡아 시즌예술단 단원들이 출연해 첫 무대를 꾸민다.
공연에 앞서 공연 연계 예술교육 프로그램 ‘두근두근 아트스테이지’도 운영된다. 프로그램은 공연 출연 단원들과 함께 음악·연기·무용을 체험하는 4차시 몰입형 교육으로 구성됐다. 참가 어린이들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소리와 몸짓, 표정으로 표현하는 활동을 통해 공연예술의 창작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음악 수업에서는 장구와 징, 레인스틱, 윈드차임 등 다양한 악기를 활용해 장단과 리듬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뮤지컬 넘버를 직접 익힌다. 연기 수업은 ‘토끼를 찾아라! 수궁 작전 연구소’를 주제로 등장인물의 특징을 분석하고 장면을 구성하며 자신만의 공연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용 수업에서는 토끼와 자라의 움직임, 바다와 파도의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하며 신체 표현력과 창의력을 키운다.
교육은 초등학교 3~5학년을 대상으로 8월 8~9일,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8월 22~23일 ACC 어린이창작실험실에서 열린다. 공연과 교육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시즌예술단의 운영 방향을 처음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이 공연의 주체로 참여하는 경험을 제공할 예정이다.
공연은 9월 4일부터 27일까지 평일과 주말은 물론 추석 연휴에도 이어진다. 관람료는 평일 1만 원, 주말 1만5천 원이며, 평일 단체 관람도 별도 신청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전당재단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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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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