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시선으로 1천300평 대지 위에 써 내린 詩<시>

입력 2025.11.16. 15:28 이용규 기자
[남도정원산책] 담양 달빛여행 정원
한편의 가족이야기 깃들어진 달빛여행 정원의 안뜰. 잔디위에 놓은 조형물과 나무, 초화류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달빛여행정원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저 멀리 천왕봉과 반야봉이 보였다. 카메라가 아닌 맨눈으로 볼 수 있음이 놀랍다. 공간적으로 떨어진 길이만 해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어슴푸레한 그 형태가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지난 10월 전남도 민간정원 제31호로 등록한 담양 대덕면 금산리 달빛여행 정원의 쉼정원 정자에 앉아서 바라본 전경이다. 달빛여행 공간 중 가장 높은 쉼정원은 이곳의 전망대 역할을 한다.

담양 대덕면 소재지를 벗어나 금산길로 가다 보니 '달빛여행 정원'이라고 쓰인 2층 건물이 눈길을 끈다. 검은색 건물의 1층 정면에는 중절모를 쓴 중년 남성이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문패가 아닌 그림으로 집주인 정체를 밝힌다. 집주인이 개성이 넘쳐나는 사람임은 분명한 것 같다.

정원지기 라규채 대표의 부인 박성자씨가 방문객을 맞는 이미지의 조형물.

건물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주인공은 달빛여행 정원의 정원지기인 라규채 대표이다. 공무원 출신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활동을 하는 그다. 그에게 정원은 인생 2막의 또 다른 분신이자, 놀이터이다. 정원에는 그가 그동안 보살핀 수목과 초화류들이 빼곡히 들어있다. 그가 열정을 담아 새긴 대지 위의 시집이다. 때론 은유의 메타포를 조형물로 담아내고, 때론 직유법처럼 폐차에 꽃을 심어 아내에게 마음을 전했다. 이렇게 라 대표의 손길로 다듬어진 조형물들은 그가 대지 위에 시를 표현하는 데 완성도를 높여주는 핵심적인 콘텐츠이다.

달빛여행 정원 규모는 1천300평으로 안뜰과 4개 사이트로 구성, 아담하다. 그 안에 있는 수목과 초화류들이 가을의 주인공으로 또 다른 빛을 내고 있다. 안뜰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가 넘친다. 안뜰의 구성물인 나무와 조형물은 각각 별개여도 하나로 묶어보면 한편의 가족드라마다. 하나하나에 스토리와 서사가 담겨 있다는 얘기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조형물.

달빛여행정원 입구에서 몇 발자국을 떼면 고개 숙인 여인 조각상이 서 있다. 실질적 정원지기인 라 대표의 부인 박성자씨가 정성스럽게 방문객들을 맞는 이미지이다. 라 대표가 10여년 전 경매장에서 이 조각 작품을 보고 아내를 떠올려 구매해 입구에 설치했다.

1남 1녀의 자녀를 둔 라 대표는 손자·손녀들의 태몽과 얽힌 조각상과 잔디 위에 사람 人(인)자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한자 사람 人(인) 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을 형상화하듯, 라 대표 부부가 존중함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안뜰에 있는 조각 작품들의 수준도 높아 부부의 남다른 예술적 안목도 엿볼 수 있다. 설치된 조형물들은 모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잘 어울린다. 아담한 수형의 다양한 나무들과 크고 작은 조각 작품들은 강약 볼륨이 있어 정원 포인트를 더해 주고 있다. 안뜰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달빛여행 정원의 랜드마크인 석류나무이다. 지인이 2024년에 기증한 석류나무는 100년을 훌쩍 넘었다. 동네 선배가 꼭 심고, 심어 구입한 석류나무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도 재밌지만, 붉은 알이 탱탱하게 박힌 튼실한 열매는 달빛여행 산책의 여운을 주는 대상이다.

안뜰 옆 언덕진 곳을 따라 조성된 수국, 장미, 달맞이정원, 쉼정원 등은 사계절 색다른 맛을 연출하는 핵심 포인트이다. 계절적으로 꽃이 빈약한 가을, 맑은 가을 햇살 아래 흔들리는 청화 쑥부쟁이는 눈이 소복이 내린 듯 고요하면서도 은은한 향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청화 쑥부쟁이가 밀원 식물이어서 꿀을 따가는 벌들이 많다. 마침, 정원에 울려 퍼진 클래식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다.

달빛여행 정원은 지난 2012년부터 조성됐다. 대덕면 금산리 출신인 라 대표가 감나무밭인 이곳을 친동생으로부터 구입하고 하나둘씩 나무를 심어나갔다. 공직 정년 5년을 남겨놓고 나만의 정원을 만들고자 내친김에 감나무밭 위의 친형님 논까지 사들였다. 공무원, 사진작가, 대학 겸임교수 등 3가지 일을 맡고 있는 그로선,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공직에 충실치 못하고 있다는 자기비판과 함께 명예퇴직을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고 재밌는 일에 전념하고 싶은 결단이었다.

사진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라규채 대표를 상징하는 다양한 카메라들이 설치 미술작품 처럼 장식돼 있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지 1년 6개월 만인 2016년 최형식 담양군수 비서실장직 부름을 받았다.

그를 아껴준 상사이자 선배인 최 군수의 "고생해달라"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공직은 최 군수가 3선 연임 제한으로 민선 8기 선거 출마를 하지 않은 지난 2022년까지 6년간 이어졌다.

공직에 있는 기간에도 정원을 향한 그의 관심과 노력은 소홀함이 없었다. 불가피하게 시간 투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출근 전에 정원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불을 켜놓고 작업을 할 만큼 정원을 가꾸는 데에는 전력을 다했다.

라 대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정원을 가꿨다"며 "하루하루가 신바람이 났다"고 회상했다.

라 대표의 정원 DNA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매사 책을 읽고 정원 가꾸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삽목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며, 나무와 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달빛여행 정원의 보물창고인 1층 오디오관 진공 오디오.

어찌 보면 시간을 뛰어넘어 라 대표의 놀이터가 되고 있는 달빛여행 정원을 바라보는 그의 자부심은 충만하다. 인생 2막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놀이 삼아 살아가겠다고 대내외에 알려졌으니 정원에 나무, 조형물 하나를 심고 설치하는데 열정과 관심이 넘쳐남은 당연하다.

그의 정원 가꾸기 철학은 자연주의적 개념을 중시하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 맞추고 있다. 최대한 인위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정원이라는 캔버스 안에 나무와 초화류, 조형물이 튀어나오지 않고 조화로운 시를 써나가는 것에 맞춰있다.

달빛여행 정원에서 압권은 차경이다. 차경은 다른 경치를 빌려다 쓰는 중국식 정원 개념이다.

그러나 라 대표는 달빛여행에 심겨진 나무와 초화류들이 주변의 환경을 최대한 활용해 극대화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달빛여행 정원의 뷰포인트는 쉼정원이다. 쉼정원 정자에 앉아 멀리 떨어진 천왕봉과 반야봉을 바라보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그 앞을 단순화했다. 방문객이 바로 눈앞의 화려한 식물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수크럼, 납작보리 사초, 모닝라이트 등을 초화류를 심어 자연주의적 정원 문법을 세심하게 풀어놓은 것이다.

달빛여행 정원의 최고 뷰포인트가 되고 있는 쉼정원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반야봉.가을걷이가 끝낸 풍경과 주변의 자연이 달빛여행정원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달빛여행 정원의 아름다운 정원을 한껏 높여주는 것은 1층 오디오관이다. 달빛여행 정원의 숨겨진 비밀창고인 이곳에서 나오는 그윽한 클래식 선율은 방문객에게 힐링과 기쁨을 더해 준다.

클래식 애호가인 라 대표 부부가 마련한 공간에는 수종의 희귀한 카메라들이 설치 미술처럼 전시돼 있고 진공관 오디오와 수천장의 LP판도 또 하나의 추억으로 안내하는 힐링 소품이다. LP판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과 커피향, 나무와 꽃은 달빛여행에서 전하는 가을의 서정이다. 1층 오디오실은 상시 개방을 하지 않지만 혹여 기회가 잘 맞는다면 귀도 즐거운 달빛여행 정원의 힐링 산책이 될 것이다.

달빛여행 정원은 오래전부터 완성도 높은 정원으로서 입소문이 났다. 당연히 정원 애호가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이름값으로 지난 10월에는 당당히 민간정원 31호로 명함을 올렸다.

순간을 포착하는 찰나의 예술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라 대표가 느끼는 자연이라는 캔버스에 시를 써가는 느낌은 어떨까

"사진은 덜어내는 예술인데 정원은 대지 위 프레임에 뭐가 채워 넣는 일을 꾸준하게 멈추지 않아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것 같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둘 이다 보니 때론 렌즈로 자연을 담아내고 때론 대지 위에서 맨눈으로 담아내는 작업들에서 또 다른 희열이 느껴집니다."

글·사진=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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