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칸영화제, 지상의 방 한 칸

@신혜진 소설가 입력 2024.05.19. 18:07
신혜진/소설가

방문을 열자 더블베드가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침대가 지나치게 작다. 침대 하나로 꽉 차버린 방에는 창문이 달려 있지만 녹슨 셔터에 막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파리에서는 이른바 '하녀방'으로 불리는 옹색한 방에서 살지만 칸에서는 어떻게 지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지 씨가 말했다.

"침대가 너무 작네요."

그녀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만난 지 불과 5분 만에 함께 사용할 침대를 바라보며 한 이불 덮을 생각에 둘이 동시에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칸영화제 숙박 공유할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 글을 내가 유학생 커뮤니티에 올렸고 예지 씨가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칸영화제에 찾아오는 손님이 해마다 8만 명이라니 안 그래도 물가 높은 남프랑스 휴양지 숙박료는 천정부지로 오른다. 행사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숙소를 구했는데도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각자 파리에서 출발했고 숙소에서 처음 만난 사이이다. 소싯적에 소형 텐트에서 여럿이 자보기도 하고 여행 때는 도미토리 이층침대도 애용하는 편이라 낯선 이와 한 공간을 쓰는 게 익숙한 편인데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예지 씨가 조그만 소파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파는 펼쳐지지 않는 거래요. 이불도 하나고..."

당신 생각을 내가 이미 안다는 뜻으로 집주인에게 들은 정보를 전달했다. 칸영화제 기간 동안 돈을 아끼기 위해 룸메이트를 구했지만 가능하면 살이 닿지 않을 방법을 찾게 만드는 방이었다.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처럼 먹고사는 일이 창조적인 일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는 걸 새삼 연상시키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김사인의 시 '지상의 방 한 칸'처럼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여행가방을 한쪽에 세워둔 채 서둘러 와인을 땄다. 집주인이 환영 선물로 가져다 놓은 레드와인이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긴장을 누그러뜨리려고 유리잔에 와인을 붓는 동안 그녀는 차분하게 짐을 풀기 시작했다. 닷새 묵을 여장치고는 단촐했다.

예지 씨는 앙증맞은 캐리어에서 원피스 한 벌과 뾰족한 구두 한 켤레를 꺼냈다. 영화 보러 갈 때 복장 검사를 통과하려면 드레스와 구두를 신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갈라 상영회에 운동화를 신고 갔다가 입장 불허된 경험이 있다. 그녀는 백팩에서 은색 소니 캠코더를 꺼내 이상이 없는지 천천히 확인했다.

테이프를 넣어 녹화하는 구형 장비였다. 사연 있어 보이는 카메라였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는 파리에 교환학생으로 와있고 다큐멘터리를 두 편 찍었다고 말했다. 캠코더에서 영상을 디지털로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 1년이 걸렸다고 묻지 않은 말도 했다. 어색해서 일부러 말을 많이 한다고 느껴졌다. 뭘 찍었는지 물어보았다.

"다큐멘터리요.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4.3 유가족 인터뷰인데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했어요."

"제주 4.3 사건 말이에요?"

나이가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대학생인 그녀가 찍었다는 영화가 뜻밖의 주제라서 속으로 놀라며 되물었다.

"그분들은 사건이나 사태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세요. 그냥 4.3이라고만 부르시더라고요."

어릴 때 할머니 댁에서처럼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게 신기하다며 카메라를 들고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어색해서 나가는 것 같았다. 나처럼 술을 마시면 간단한 걸...

취해서였을까. 칸영화제 정보들을 검색하는 동안 내 머릿속은 제주 중산간 지역을 헤매고 있었다. 레드카펫 행사를 위해 매일 아침 대형 카펫이 교체된다.

영화제 기간 동안 소모되는 카펫은 180미터나 된다. 한라산 해발 180미터... 아니지, 레드 카펫 180... 매일 교체... 수첩에 메모하는 동안 제주 들판에 함부로 버려진 시신들에서 붉은 피가 검은 땅에 스며들었다. 출렁이는 붉은 와인이 비릿해졌다.

오늘은 그녀가 파리로 돌아가는 날이다. 우리는 한 침대를 쓰느라 어쩔 도리 없이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잘 때 빼고 닷새 동안 만날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녀는 영화 한 편이라도 더 보려고 애썼고, 뾰족구두에 쓸려 상한 발에 밴드를 붙인 채 소니 구형 캠코더를 들고서 인파를 헤치고 다니느라 너무너무 바빴다.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칸영화제에 초청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본인 작품을 가지고 참석해요. 초대 받으면 칸영화제에서 비행기표랑 방도 준대요."

내 말에 예지 씨가 작지만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래야겠어요." 신혜진 (소설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23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8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