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모습 계속 떠올라", 영웅들의 숨겨진 아픔

입력 2025.12.28. 21:21 이삼섭 기자
<상>불길 밖 죽음: 소방관 트라우마 국가 책임을
제주항공 참사 1년 지났어도
머릿속 맴맴 일상 생활 어려워
정신적 고통 개인 기질로 낙인
공상 신청땐 반려해 높은 벽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1년을 맞았다. 사고 당시 철야 및 주야 2교대 작업으로 박정빈 소방관을 비롯한 전남119특수대응단 대원들이 바닥에 지쳐 쓰러져 있는 모습.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맞은 지 1년이 지났다. 참담했던 유가족들의 고통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가운데 그날의 또다른 당사자였던 소방관들도 깊은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시름하고 있다. 참혹한 현장을 반복적으로 마주하며 소방관들은 트라우마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작 이 같은 고통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당하는 현실 속에서 더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무등일보는 대형 참사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들의 기억과 고통을 통해 트라우마가 더 이상 침묵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다뤄져야 할지 함께 고민해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2024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 활주로. 검게 그을린 동체, 뒤엉킨 좌석, 바닥에 흥건히 고인 체액과 항공유 냄새 속으로 소방관들이 들어갔다. 생존자를 찾는 손길은 곧 시신을 수습하는 손길로 바뀌었다. 찢긴 옷가지와 가방, 시계, 여권들이 구조대원들의 발밑에 흩어져 있었다. 그날의 장면은 그렇게 각자의 머릿속에 남았다.

참사 이후 한 달, 두 달, 일 년 다 되도록 현장은 그들의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게 했다. 전남소방본부에서 참사에 동원된 소방공무원은 모두 1천2명. 네 명 중 한 명(243명)은 "잠을 잘 수 없다", "현장이 반복해서 떠오른다"며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치료군'으로 분류된 인원만 52명에 달했다. 191명은 지속적인 추적·관찰이 필요한 '관심군'으로 관리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숫자일 뿐. 이들의 고통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관들은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고, 비슷한 냄새만 맡아도 숨이 막힌다. 현장에 다시 투입될까 두려워 출근길이 무거워진 이들도 많다.

하지만 소방관들의 고통은 좀처럼 공무상 재해(공상)로 인정받지 못한다. 입증 책임은 물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의료 기록 등 자료 준비를 모두 개인에게 떠넘기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신 질환을 '개인 기질'로 보는 내부 인식이 있어 공상 신청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PTSD와 정신 질환을 호소하는 소방관이 급증했지만 실제 공상 신청으로 이어진 사례는 거의 없다.

최근 4년간 광주·전남 공상신청 현황을 보면 물리적 상해를 포함한 전체 신청 건수는 증가한 데 비해, 정신질환을 이유로 한 공상 신청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설령 신청하더라도 반려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픽=이은영

28일 무등일보 취재 결과 최근 4년간(2021~2024년) 소방공무원 공상 신청 5천522건 가운데 정신질환은 98건(1.8%)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24건(24.4%)은 반려 혹은 보류 처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7월 이태원 참사 현장에 투입됐던 한 소방공무원은 정신질환으로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으나 불승인 판정을 받은 뒤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광주·전남지역으로 좁혀보면 같은 기간 광주에서는 지난해 정신 질환을 사유로 1건이 신청됐다. 전남에서는 2021년과 2023년 각각 우울증 1건씩, 지난해 조현병 1건 등 총 3건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두 건(우울증)은 인정받았으나 1건(조현병)은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그에 비해 물리적 상해를 포함한 전체 공상 신청 건수를 살펴보면 광주는 1건, 13건, 21건, 23건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전남도 83건, 73건, 122건, 125건으로 급증했다. 반면 정신 질환을 이유로 한 공상 신청의 경우 광주는 한 건, 전남은 4개년에 걸쳐 3건에 그쳤다.

언뜻 보면 공상 인정 비율이 높은 것으로 보이지만 정신질환을 이유로 한 공상 신청 자체는 넘기 힘든 거대한 벽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실제 정신 질환을 호소하는 소방관 수에 비해 과도하게 적은 수치라는 게 내·외부의 공통적 목소리다. 현장 소방관들이 공상 신청을 신청해도 인정받기 어렵고, 오히려 낙인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남소방 소속 A씨는 "공상 신청 기록은 전 국민과 동료, 지인 모두가 볼 수 있어 낙인 공포가 크고 승진 신청에서도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다"며 "공상 신청을 하려면 책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혼자 준비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정신적으로 아파도 말 못 하고 끙끙대다가 혼자 극단적 선택을 하는 동료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2023년 개인의 공상 입증 부담을 완화하고 소방관의 공무상 재해 인정 범위를 넓힌 '공상 추정제'가 도입됐지만,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노무법인무등 정미선 공인노무사는 "건강보험이나 요약급여내역 10년 치 등 다른 서류는 그렇다 쳐도 당장 개인이 본인만 확인할 수 있는 최초 병원진단부터 최근까지 모든 의무기록을 제출해야 하니 거기서부터 많은 소방관들이 신청을 포기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공상 추정제가 생겼지만, 특정 업무로 인해 내가 그 질병을 얻었다는 인과관계를 소명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며 "정신 질환의 경우 '극한적 사고'에 한 해 인정해 주고 있는데, 소방관은 사고 현장에 반복 노출되면서 정신적 고통이 누적되는 게 일반적이기에 입증이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또 공상을 인정받기 위해 제출한 병력을 트집 잡아 '원래 기질적으로 있던 거 아니냐'며 개인 질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지역 정치권에서도 정부와 지방정부가 제도적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나광국 전남도의원(무안2)은 "1년 전 여객기 참사에 이어 도서관 붕괴 등 사회적 재난이 반복되고 있지만, 정작 소방공무원의 정신 건강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며 "일선서에 공상 처리 전담조직을 설치하는 등 소방본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삼섭기자 seobi@mdilbo.com

최류빈기자 rub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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