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윤회라는 불교적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온다. 여름이 나쁘다 해 여름이 안 올 것도 아니고 겨울이 싫다 해서도 마찬가지다.
봄이 있어 여름이 있고, 여름이 있어 가을 그리고 겨울, 그렇게 다시 봄으로 오는 것은 자연적이고 또 인간적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중년, 중년에서 장년으로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 다시 같은 삶을 반복한다.
서양의 철학자 니체의 표현을 가지고 오면 영원히 반복되는 사건, 즉 영원회귀다. 우리의 운명은 수레바퀴처럼 일련의 순서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그러나 윤회든 영원회귀든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예상 가능한 '순환' 속에서 업을 쌓고(윤회), 주체적으로 극복(영원회귀)하는 삶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즐기면 그뿐이다. 가혹한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다시 오는 봄을 준비하면 된다.
우리의 인생사가 그러하듯 인간이 만들어내는 도시도, 공간도 마찬가지다. 공간도 가장 찬란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영원할 순 없다. 에너지는 무한히 증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정된 에너지는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어느 공간이든 언젠가 찬란함을 다른 곳에 내어주고 암울함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다시 생명력을 얻고 또 반복된다.
반도상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낡은 건물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공간. 그곳이 한때 가장 찬란했던 전자상가였다는 건 도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다. 1980년대 생겨난 대인동 전자전문상가(반도·금남 등)는 1990년대까지 광주시민들이 전자제품을 사려고 구름같이 몰려들던 곳이다. 그러다가 1998년 호남 최대 전자제품 쇼핑몰인 금호월드가 생기면서 일순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거기에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인터넷 쇼핑이 활발해지면서 사실상 소멸 상태에 놓였다.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한때 얼마나 잘나갔는지, 돈을 얼마나 쓸어 담았는지를 추억하는 주인장의 깊게 팬 주름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생명을 온전히 다하고 나서야 다시 태어나는 법일까.
광주 동구 대인동 반도전자상가가 디지털 전자 과학관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 쓰임에 대한 평가를 떠나, 상가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복합공간으로 재탄생한다니 반가운 일이다.
비단 반도상가뿐만은 아닐 테다. 반도상가의 몰락을 가져온 금호월드도 반도상가의 길을 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금호월드의 에너지를 앗아간 신세계·롯데백화점도, 그리고 앞으로 생길 더현대 광주·신세계 아트앤컬처도 같은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어느 것이 됐든 그 찬란함이 온전히, 그리고 영원할 거라고 믿는 건 우스운 일이다. 운명의 굴레 속에서도 우리의 상상은 담대해야 한다.
지금도 광주에서는 무수히 많은 공간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소멸을 두려워하기보다 또 다른 생성을 상상하면 할수록 도시가 더 건강해질 거라고 믿는다.
이삼섭 취재1본부 차장대우 seob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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