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의미·가치에 대한 이해 뒤따라
한강 노벨상 1주년 문학기행도 참여
"외부 작가 광주 유입 위한 지원 필요"
"예술로써 오월정신 알리려 힘쓸 것"

영화 '서울의 봄' 타이틀을 쓴 서예가 장천(章川) 김성태 작가는 "'서울의 봄'을 쓰고 난 뒤에야 비로소 5·18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다고 밝혔다.
김 작가는 영화 표제를 작업한 뒤 '광주와 5월'을 전보다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서울의 봄 표제를 작업한 이후 매년 5월이 되면 광주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바쁜 일상 속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영화의 흥행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5·18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의 봄' 타이틀 작업 과정은 그의 5·18에 대한 인식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김성수 감독이 직접 작업실을 찾아와 영화의 취지를 설명했고, 김 작가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여러 글씨를 써 보였다. 그렇게 즉석에서 1천300만 관객을 이끈 영화의 타이틀이 탄생했다. 김 작가는 "처음에는 '봄'이라는 단어 때문에 밝은 느낌을 떠올렸는데,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며 "영화의 정서를 반영해 글자 속에 짓밟힌 봄, 싸움의 흔적, 잡초처럼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 작가는 이 작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광주와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과거 행사나 전시 참여 차 몇 차례 광주를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연고는 없었다. 그러나 영화 표제 작업 이후 광주와 5·18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지난해 5·18 주간에는 관선재갤러리에서 전시 '광주의 봄'을 열었다.
김 작가는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께서 광주에서도 전시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셨고, 어렵게 갤러리를 구해 전시를 열게 됐다"며 "당시 타지에서도 많은 분들이 관람하러 와 주셔서 5·18에 대한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전시에는 오월 광주의 희망을 표현한 '흥'과 '봄', 김남주 시인의 시 '학살'을 바탕으로 한 '오월' 등 30여점의 작품이 걸렸다. 작품 '오월'은 전시가 끝난 후 오월어머니집에 기증했다.
김 작가는 "광주는 5·18의 상흔을 품은 비운의 도시이지만, 동시에 민주화를 꽃피운 희망의 도시라고 생각했다"며 "'아픔 속에서도 결국 빛은 있다'는 의미로 당시 전시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많이 내걸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들이 김 작가를 '소년이 온다, 광주를 만나다' 문학기행으로 이끌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1주년을 기념해 전국 문학인들과 함께 5·18 사적지를 돌아보는 이번 기행은지난 4~5일 이틀간 진행됐다.
5·18의 역사 현장에서 그는 더 큰 울림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아이들까지 희생된 것을 보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며 "이유 없이 시민들이 희생됐는데, 가해자들은 끝내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 부분은 한 국민으로서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작가는 광주가 5·18 정신과 지역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외부 예술가 유입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작가는 "광주 지역 작가들의 전시는 지역 사람들이 주로 보지만, 외부 작가의 전시는 그 작가의 지인과 주변 사람들이 함께 광주를 찾는 매개체가 된다"며 "다만 외부 작가들이 광주에서 전시나 공연을 하면 수익이 안 나는 경우가 많아 선뜻 오기 어렵다. 광주가 기본적인 지원을 해주면 훨씬 많은 예술가가 광주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을 언급하며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오는 것'이라 했듯, 작가도 한 명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주변의 모든 카테고리가 함께 들어온다"고 덧붙였다.
KBS 아트비전 영상그래픽 팀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 작가는 그동안 250여회 국내외 그룹전과 18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법정스님 원적 1주기 추모 기획초대전,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전, 이해인 수녀 시문을 바탕으로 한 '아이가 희망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1주년 기념전 '아! 충무공' 등 명사 어록을 주제로 한 전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올해 7월 서울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글의 조형성과 서정성을 표현한 '나랏말글씨' 초대전을 개최했다.
김 작가는 "좋은 말을 오래 쓰고 읽는 과정에서 마음에 도량이 서는 느낌이 든다"며 "광주에서의 일련의 경험은 제 삶과 작업 모두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 될 것 같다. 광주 밖에서도 여러 장르의 다양한 예술가들이 5·18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도 예술로써 오월정신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힘쓰겠다"고 말했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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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에서 시작된 그림 인생···구름천사, 노의웅 화백
19일 오전 노의웅 화백이 광주 남구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 앞 담벼락에 그린 만국기 벽화를 소개하고 있다. 강주비 기자
"그저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19일 오전 광주 남구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에서 만난 노의웅(82) 화백의 말이다. 평생 그림을 그려온 노 화백에게 남은 목표를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노 화백은 "'계속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분명한 목표"라고 말했다.노 화백의 첫 그림은 '상상 속'에서 시작됐다. 크레용이나 도화지조차 없던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는 들판과 하늘이었다.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리는 법'을 익혔다. "구름 모양이 계속 변하잖아요. 그 형상을 따라 상상하다 보면 온갖 그림이 다 나왔지요."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교실마다 붙일 포스터를 도맡아 그렸고, 자연스럽게 선생님들의 눈에 띄어 그리는 그림마다 칭찬을 받았다. 노 화백은 "보지 못한 대상을 상상으로 그리는 그림이었는데, 그때부터 상상 그림을 계속 그려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노 화백은 자연스럽게 미술의 길로 접어들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초기에는 풍경화 작업을 오래 했다. 전남 곳곳을 찾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풍경을 캔버스에 옮겼다. 그러다 작업을 이어가던 중 스스로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남들과 같은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되는가.' 노 화백은 "미대 학장까지 했는데, 내 세계가 없는 작품을 계속하는 게 맞느냐는 고민이 컸다"고 했다. 그 질문은 결국 작업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19일 오전 노의웅 화백이 광주 남구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 옆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강주비 기자이후 노 화백은 작품을 완성하면 반드시 인터넷 검색부터 했다. 완성도와 별개로 유사한 작품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고심 끝에 그린 작품도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되면 미련 없이 폐기했다. 이런 과정을 스무 차례 넘게 반복한 끝에, 그의 대표작 '구름천사'가 탄생했다. 노 화백은 "나만의 작품이라고 생각해도, 지구 반대편에 비슷한 게 있으면 그건 폐기 처분했다. '모방 작가'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라며 "어렸을 때 하늘을 보며 상상했던 기억이 결국 구름천사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구름천사는 구름 속에서 천사의 형상이 드러나는 상상적 이미지다. 모든 작품의 제목은 동일하게 '구름천사'로 붙는다. "저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운 곳 천사들이 사는 곳이라는 환상"에서 출발한 그림이다.수천 점에 이르는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 역시 첫 번째 '구름천사'다. 노 화백은 "처음 그렸던 구름천사를 보고 '아, 이건 정말 내 그림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며 "지금까지도 여러 크기의 캔버스에 구름천사를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19일 오전 노의웅 화백이 광주 남구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에 전시된 '구름천사'를 소개하고 있다. 강주비 기자작업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노 화백은 삶의 공간도 바꿨다. 도시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인 양과동으로 내려온 지 7년째다. 이곳에 미술관과 작업실, 수장고를 함께 마련했다. 노 화백은 "시내에서는 화실 따로, 집 따로니까 춥다고 안 나가고 그러다 보면 작업을 못 하게 된다"며 "여기서는 출근길이 10m도 안 된다.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하루에 10시간씩 매일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노의웅 미술관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작품을 교체한다. 수장고에 보관된 4천여 점의 작품 가운데 안 걸었던 그림을 찾아 전시하고, 철수한 작품은 다시 수장고로 옮긴다. 미술관 문은 밤낮 없이 열려 있어 누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볼 수 있다.최근 그의 작업은 미술관 안을 넘어 동네로 확장됐다. 미술관 바로 앞,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낡은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노 화백은 허술해 보이던 담을 정리한 뒤 세계 여러 나라 국기를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꼬박 열흘을 매달려 완성한 '만국기 벽화'는 그의 새해 첫 작품이다.노 화백은 "벽화 하면 꽃 같은 게 많지 않은가. 근데 만국기는 거의 없더라.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만국기를 그려 넣으니 화려하고 보기 좋다며 주민분들이 말씀해 주셨다"고 웃었다.19일 오전 노의웅 화백이 광주 남구 양과동 '노의웅 미술관'에 전시된 '금강산의 향연'을 소개하고 있다. 강주비 기자다만 노 화백은 작품을 판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아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노 화백은 "나의 예술 철학과 작품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작품은 판매하지 않는다"며 "덕분에 수장고에는 수천 점의 작품이 남았다. 아마 본인 작품을 이렇게 많이 소유한 화가는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이 작품과 공간이 자신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주변 부지를 확보해 전시 공간을 넓히고, 제2·제3 전시장을 만드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아 미술계에 입문한 두 명의 자녀가 다음 세대에도 이를 이어가 주길 바라고 있다.노 화백은 "오늘도, 내일도 작업실 문을 열고 그림을 그릴 것"이라며 "그림을 그리는 하루하루, 그 자체가 내 인생"이라고 말했다.노의웅 화백. 강주비 기자노 화백은 광주 출신 서양화가로, 60여년 동안 행복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예술공론상과 광주시민대상, 오지호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학장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노의웅 미술관은 광주 남구 양과동 966-1에 위치해 있으며, 매주 월·화요일은 휴관이다.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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