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 성산 계곡에 모인 선비들···‘성산계류탁열도’ 원본 첫 공개

입력 2026.09.16. 16:55 강승희 기자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이사장 산문집 ‘학탄여적’(문학들)에 실려
선비들이 성산 일대서 시회 열며 더위 씻는 풍경
그동안 목판본으로만 전해져…'예향도시' 보여줘

그동안 목판으로만 전해져온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의 원본이 최초로 공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성산계류탁열도’는 지난 1590년(선조 23) 삼복의 어느 날 일군의 선비들이 성산 일대(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일원)에서 시회를 열며 더위를 씻는 풍경이 담긴 그림이다.

이 그림 원본은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이 최근 펴낸 산문집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문학들) 마지막 페이지에 별지로 실렸다. 그동안 김성원의 ‘서하당유고’, 정암수의 ‘창랑유집’에 목판본으로만 전해 온 그림의 원본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

그림은 11명의 선비가 모여 더위를 피하는 모습과 함께 갓을 쓴 유생 19명과 시종 16명이 등장한다. 그림 상단에는 성산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환벽당과 식영정 등이 배치돼 호남 시단의 중요한 장소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담긴 글도 눈에 띈다. ‘성산계류탁열도’라는 제목 다음으로 설월(雪月) 김부륜(金富倫), 기오헌(寄傲軒) 오운(吳澐),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환벽당(環碧堂) 김사로(金師魯) 등 11명의 이름과 ‘만력(萬曆) 경인(庚寅) 하(夏 ) 복일(伏日)’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림 왼편에는 설월당 김부륜과 기오헌 오운의 시와 함께 ‘그해 초겨울 두루마리에 시축을 따라 지었다’는 서하당 김성원의 설명이 실렸다.

정 이사장은 “1500년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여름이면 식영정에 모여 시회를 했는데 ‘성산계류탁열도’에 당시 참여했던 선비들 명단이 나와있다”며 “그 중 한 분인 창랑(滄浪) 정암수(丁巖壽)가 12대 할아버지다. 창랑집에 목판본을 실었는데 이번에 원본이 세상이 나와서 책에 수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고미술품 경매 때 목판본에서 봤던 진본이 나왔고, 전남광주의 고미술 전문가가 낙찰 받아 소장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면서 “전남광주는 정철 선생과 가사문학의 산실로, 이곳이 ‘예향의 도시’라는 점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산문집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는 학여울과 무등산에서 출발해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과 선현들의 정신세계를 두루 살피는 역사·기행 산문집이다. 책의 제목에서 ‘학탄(鶴灘)’은 저자의 고향인 화순 적벽의 학탄리, 곧 학여울을 말하며 ‘여적(餘滴)’은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역사와 산천을 찾아다니며 품어온 생각의 자취를 글로 남긴다’는 뜻을 담은 셈이다.

책의 제3부 선현의 산행기’에는 초정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과 율곡 이이의 ‘비로봉에 올라서-풍악산 유람기’가 실려 있다. 선인들의 산행기 중 백미로 손꼽히는 글들이다. 책 말미에 실린 이영희의 ‘광주민주항쟁 ‘배후조종’ 영광기‘는 권력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조작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의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문학들)에 실린 ‘성산계류탁열도’의 원본. 문학들 제공

정 이사장은 책 출간과 관련 “우리 향토사와 관련된 부분이고 1980년 5·18 수난의 시대를 겪은 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내용”이라며 “최근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다녀오고, 무등산 관련 좋은 글도 모아 둬서 독자들과 나누고자 펴내게 됐다 ”고 의미를 설명했다.

정 이사장은 전남 동복현 내서면 학탄리 출신으로 교단에서 36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0년 5·18항쟁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역사의 수례를 밀며’, ‘역사 앞에서’가 있다.

강승희기자 wlog@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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