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이 성산 일대서 시회 열며 더위 씻는 풍경
그동안 목판본으로만 전해져…'예향도시' 보여줘

그동안 목판으로만 전해져온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의 원본이 최초로 공개돼 주목을 끌고 있다.
‘성산계류탁열도’는 지난 1590년(선조 23) 삼복의 어느 날 일군의 선비들이 성산 일대(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일원)에서 시회를 열며 더위를 씻는 풍경이 담긴 그림이다.
이 그림 원본은 정규철 아카데미 학여울 이사장이 최근 펴낸 산문집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문학들) 마지막 페이지에 별지로 실렸다. 그동안 김성원의 ‘서하당유고’, 정암수의 ‘창랑유집’에 목판본으로만 전해 온 그림의 원본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그림은 11명의 선비가 모여 더위를 피하는 모습과 함께 갓을 쓴 유생 19명과 시종 16명이 등장한다. 그림 상단에는 성산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환벽당과 식영정 등이 배치돼 호남 시단의 중요한 장소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담긴 글도 눈에 띈다. ‘성산계류탁열도’라는 제목 다음으로 설월(雪月) 김부륜(金富倫), 기오헌(寄傲軒) 오운(吳澐),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환벽당(環碧堂) 김사로(金師魯) 등 11명의 이름과 ‘만력(萬曆) 경인(庚寅) 하(夏 ) 복일(伏日)’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림 왼편에는 설월당 김부륜과 기오헌 오운의 시와 함께 ‘그해 초겨울 두루마리에 시축을 따라 지었다’는 서하당 김성원의 설명이 실렸다.
정 이사장은 “1500년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여름이면 식영정에 모여 시회를 했는데 ‘성산계류탁열도’에 당시 참여했던 선비들 명단이 나와있다”며 “그 중 한 분인 창랑(滄浪) 정암수(丁巖壽)가 12대 할아버지다. 창랑집에 목판본을 실었는데 이번에 원본이 세상이 나와서 책에 수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고미술품 경매 때 목판본에서 봤던 진본이 나왔고, 전남광주의 고미술 전문가가 낙찰 받아 소장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면서 “전남광주는 정철 선생과 가사문학의 산실로, 이곳이 ‘예향의 도시’라는 점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산문집 ‘학탄여적-학여울에서 역사를 생각하다’는 학여울과 무등산에서 출발해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과 선현들의 정신세계를 두루 살피는 역사·기행 산문집이다. 책의 제목에서 ‘학탄(鶴灘)’은 저자의 고향인 화순 적벽의 학탄리, 곧 학여울을 말하며 ‘여적(餘滴)’은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역사와 산천을 찾아다니며 품어온 생각의 자취를 글로 남긴다’는 뜻을 담은 셈이다.
책의 제3부 선현의 산행기’에는 초정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과 율곡 이이의 ‘비로봉에 올라서-풍악산 유람기’가 실려 있다. 선인들의 산행기 중 백미로 손꼽히는 글들이다. 책 말미에 실린 이영희의 ‘광주민주항쟁 ‘배후조종’ 영광기‘는 권력이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조작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정 이사장은 책 출간과 관련 “우리 향토사와 관련된 부분이고 1980년 5·18 수난의 시대를 겪은 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내용”이라며 “최근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다녀오고, 무등산 관련 좋은 글도 모아 둬서 독자들과 나누고자 펴내게 됐다 ”고 의미를 설명했다.
정 이사장은 전남 동복현 내서면 학탄리 출신으로 교단에서 36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0년 5·18항쟁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역사의 수례를 밀며’, ‘역사 앞에서’가 있다.
강승희기자 wlog@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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