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한땐 '대통령 빽'···완도 어부는 잘나갔던 핸드백 디자이너였다

입력 2021.10.06. 17:36 김봉일 기자
[금일도 귀어민 구종삼씨의 인생역정]
중졸 후 3년간 일본서 디자인 공부
국정농단 연루 고영태 협력업체로
박근혜 전 대통령 클러치백 만들어
중국 납품 어긋나 빚더미 수렁에
2천만원 달랑 들고 가족과 고향행
거친 바닷일·막노동 어렵사리 정착
구종삼씨가 선박매입자금을 지원받아 마련한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완도군 금일읍 월송리 앞바다에서 다시마와 청각 등 해조류와 자망어업으로 제2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구종삼(50)씨. 구씨는 이곳 금일도 태생이지만 귀어를 결심하고 결행하기까지 험난한 역정을 거쳤다. 금의환향(錦衣還鄕)해도 시원찮을 판에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것도 혼자 몸이 아닌 직계가족 세 명과 장인·장모까지 모두 다섯 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채 낙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접고 겨우 마련한 2천만원이 전부였던 그는 지난 2018년 7월 눈물의 낙향을 감행했던 것이다. 어지간한 용기와 뚝심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따가운 시선과 편견, 설움을 이겨내야 하는 절절한 인내심만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낡은 집 매입비와 수리비를 합쳐 1천300만원을 쓰고 남은 700만원으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했던 섬 생활이었다. 아무리 아껴 써도 2~3개월이면 바닥날 그 돈으로 고향에서의 첫 신호탄이 울렸다. 새롭게 바다 일을 배운다는 자세로 닥치는 대로 임했다. 다시마 등 해조류를 따고 말리는 일, 양식장 시설보수와 철거작업 등 어민들이 주는 일이라면 정말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꼬박 1년을 생활했다.

끈기와 힘만 있으면 쉬울 것만 같았던 바다일은 그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배우던 기억 속의 일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를 악물고 거친 바다 일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실함과 진득함을 믿고 말없이 따라준 베트남 하노이 출신 아내 웅우엔 티탄화(30)씨와 지현(8)·지윤(6)양, 장인·장모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여기서 다시 쓰러지느냐, 일어서느냐 너무나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완도 금일 고향으로 귀어한 구종삼씨는 한때 잘나가던 핸드백 회사 사장님이었다. 그는 "직접 만든 여성용 클러치백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들고 다녔다"고 했다.

"부모님 고향이라지만 사고무친의 고향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반겨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기웃기웃 일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겠으니 제발 써주기만 하면 고맙겠다며 일당제로 바다 일을 시작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역시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지금은 형님으로 모시는 조광근(53) 이장님은 딱한 처지에 놓인 저희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든 앞장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한 푼이 서러운 저희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 일자리를 알선해 주셨습니다. 이장님은 제 생애 잊을 수 없는 세 분 가운데 한 분입니다." 고향 땅에서 그의 인생 3막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여가 지난 요즘, 구씨는 서울에서 무작정 내려올 때에 비해 한층 여유로워졌다. 그간 어업인후계자 교육을 받은 후 어업인후계자로 선정되면서 연 이자율 2%짜리 선박매입자금과 영어자금을 지원받아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많이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다 일에 열심이다. 매일 새벽 4시께 일어나 허가를 받은 자망어장에서 6~7시간을 보낸 다음, 또다시 오후 3시께부터 4시간쯤 일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한다. 구씨는 "아직도 어설픈 어부지만 초등학생 2~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바다 일을 하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구종삼씨의 아내 웅우엔 티탄화씨가 친정 어머니와 함께 어망 손질을 하고 있다.

아내 티탄화씨도 엄마와 함께 하루 온종일 그물에 걸린 어패류를 걷어내고 그물을 보수하는데 여념이 없다. 지난 2일 오후에도 베트남 모자를 눌러쓰고 엄마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다. "어부의 일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물고기를 잡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물에서 각종 어패류를 걷어내고 그물망을 수선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요. 꾸준하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식구들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날이 올거라 믿어요." 티탄화씨는 이런 말을 전하면서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씨는 한때 잘 나가던 핸드백 제조회사의 대표였다. 지난 2006년 일본 사이타마현 동남부 야시오시의 유명 가방회사에서 스카우트할 만큼 핸드백 제조기술도 출중했다. 3년간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핸드백의 디자인 감각 등을 더욱 새롭게 익혔다. 귀국한 뒤 고민하던 그에게 핸드백 샘플사업은 솔깃한 러브레터와 같았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고영태씨의 가방 제조회사인 '빌로밀로(Villo Millo)'와 코오롱FnC 가방브랜드 '쿠론(Cournne)'의 협력업체로 활동하자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회사의 매출액이 한순간에 늘어났고, 규모 역시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그는 핸드백업계에서 성실한 장인(匠人)으로 자리매김 해갔다. 한솥밥을 먹었던 직원들만 해도 수 십여명에 달했다. 실제로 그가 직접 만든 여성용 클러치백 2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또 다른 사업 제안 요청이 들어왔다. 한창 스마트폰이 인기를 구가할 당시 스마트폰 케이스 반제품 제작해보라는 것이었다. 업체들로부터 선수금도 수 천 만원씩 받았다. 중국 등 해외로부터 납품 제의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구씨의 발목을 잡게될 줄이은 꿈에도 몰랐다. 플라스틱을 제외한 반제품 '아이폰' 가죽케이스 10만대 분의 제작이었다. 납품기일 등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밤낮으로 공장을 풀가동했다. 7만대 분 케이스의 제작이 끝나갈 즈음, 중국업체에서 클레임을 걸었다.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등의 트집을 잡았다.

앞이 캄캄했다. 그의 앞에 느닷없는 손실금 4억3천여만원을 처리해야 하는 제동이 걸렸다. 억울한 마음에 지리한 법정싸움을 벌인 끝에 승소하기는 했지만 구씨의 심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세월을 기다려준 거래처 사장들에게 구씨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했다. 거래처 사장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꺼번에 빚을 갚을 수 없으니 적금통장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그리고서 이자는 갚지 못할지언정 매달 적금을 넣는 식으로 원금만이라도 청산하겠다며 약속했다. 그는 4년동안 40여곳의 거래처 사장들에게 3억여원을 꾸준히 갚아나갔다. 빚을 갚아나가는 세월동안 많던 주문량도 차츰 줄어들었다.

그는 기계를 파는 등 공장을 정리해서라도 약속한 빚은 갚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직까지도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있는 고마운 이들이 있다고 했다. 가장 아프고 힘들 때 선결재를 해주며 진심으로 도와준 전용갑(53) 대표와 김영진(49) 대표에게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의 서울 양천구 신월동 공장은 흔적도 없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다.

"부모님 산소에 가서 하루 온종일 울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술과 낚시로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공장이 넘어가던 날, 집사람한테 모든 걸 잊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람은 '당신이 그렇게 힘들면 고향으로 내려가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던 집사람이 막상 이제 낙향해야 할 시점이라고 얘기했을 땐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하소연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지현이 아빠, 여기서 그냥 살면 안돼… 정말 안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아픈 사연을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열 다섯 어린나이에 금일도를 떠나 부산의 핸드백 제조공장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던 구종삼씨. 각종 심부름과 가내수공업 공장의 청소 일을 도맡아하면서도 오직 핸드백 만드는 기술만 착실히 익히면 성공할 수 있다고 악바리처럼 열심이었던 그였다. 하지만 인생은 3막5장의 연극이라던가, 일장춘몽의 연속이라던가. 시련과 아픔이 닥쳐왔고, 이제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꿋꿋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다. "딱히 소망이나 꿈은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그저 집사람과 아이들이 건강하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눈물 나는 세상을 아름다운 가슴으로 이끌어가는 그의 앞길에 다시는 고난의 가시밭길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김봉일기자 amazingreporter@mdilbo.com 완도=조성근기자

슬퍼요
19
후속기사 원해요
15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3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