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피해자들을 유인한 뒤 협박해 성착취물을 찍게하고 이를 유포해 수익구조를 만든 조주빈이 검거된 이른바 텔레그램N번방 사건은 우리사회 음지에 숨어있던 익명범죄의 존재를 드러내며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다. 당시 이 N번방에는 20만명이 참여해 있었다. 1~2년새 범죄는 진화했다. AI를 기술을 이용해 이미지 합성으로 손쉽게 음란물을 만드는 이른바 '딥페이크 성범죄'가 등장한다. 2020년부터 인하대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한 불법 합성물을 제작 유포해 온 30대 남성 운영자가 최근 검거됐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했으나 3개월만에 해외서버를 이유로 수사가 종결 됐고 이후 피해자가 직접 대화방에 잠입해 증거를 수집하며 운영자를 특정하는데 성공하면서 가해자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며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경종만 울렸다. 지난 21일부터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 범죄가 일어난 피해 학교 명단이 올라왔다. 명단은 가히 충격이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이 10대 여성이었으며, 심지어 명단에는 여학교도 있었다. 이는 가해자가 남성교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초중고를 시작으로 대학교, 군조직까지 딥페이크 성범죄 텔레그램 방의 존재가 알려지며 파장이 일었다. 더하여 여성 가족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성착취물을 유포하는 텔레그램 대화방도 공론화 되며 학교, 직장, 이제는 집에서 까지 여성들이 안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디지털 성범죄 특히 딥페이크, 불법촬영물과 같은 범죄는 가해자를 잡아도 범죄는 계속된다. 앞선 사건의 가해자들은 (미미하지만)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유사한 텔레그램 채널들이 운영되고 있다. 오히려 범죄의 범위가 더 확장되어 발생하고 있다. 현행법 상 SNS를 통해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제작·유통하는 경우 피해 대상이 아동이면 청소년성보호법이 적용돼 문제 영상을 소지·시청하면 1년 이상의 징역, 제작·배포할 경우 최소 징역 3년,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된다. 성착취물 피해자가 14세 이상이면 성폭력처벌법이 적용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그러나 딥페이크 성범죄 자체에 대한 별도 처벌은 없다. 심각성은 부각되고 있지만 정부기관들은 대책을 못내놓고 있는게 실정이다.
최근 텔레그램의 CEO인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되었다. 보안성이 강한 메신저의 특성 상 마약, 성범죄 등 각종 사이버폭력과 불법 콘텐츠에 텔레그램 측이 이를 방치했다는 혐의였다. 당연하게도 텔레그램도 이면이 있다. 통신비밀을 보호하고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 '사이버 망명' 으로 주목받았던 텔레그램이 10년 뒤, 지금은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으로 자리잡았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익명으로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표현 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앞서 이는 온라인상의 폭력으로부터 누구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이번에 공론화 된 텔레그램 대화방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22만명이다.
24년 5월 기준 한국의 개인택시가 24만대이다. 거리에 흔히 보이는 그 택시의 숫자만큼,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한 22만명의 사람들을 일상에서 마주치지 않을 확률은 몇퍼센트 일까. 아주 희박할 것이다. 평범한 숫자 그래서 더 무서운 숫자, 22만명이라는 숫자는 그런 숫자다.
성범죄가 이제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디지털 공간은 무한하다. 가해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범죄는 영원히 박제 된 채 끝나지 않는다. 디지털 성범죄의 특징 중 하나는 새로운 가해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 제작·유포자에 이어 관전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관전자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거기에 더해 이 관전자는 다시 유포자가 되기도 한다.
한 때 1997년 세운상가에서 거래되던 '빨간 마후라 비디오' 디지털 성범죄의 시초 라고 봐도 무방한 이 사건은 가출청소년이었던 피해자가 정서적으로 무력해진 틈을 타 남학생들이 집단 성관계를 하고 촬영물을 유포해 팔았던 사건이다. 이듬해 청소년 보호법이 제정된다. 청소년 보호법의 주 내용은 미성년자의 음란물 시청 금지였다. 성에대한 폐쇄적인 관점과 동시에 사건의 본질이 외면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을 모티프로 하는 드라마, 영화 등이 제작되며 피해자의 삶을 왜곡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향한 모욕과 은근한 멸시는 멈추지 않았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하다. 조주빈 사건(텔레그램 N번방) 이 처음 공론화됐을때도 피해자들 중 일부가 가출 청소년이다, SNS에서 음란계정을 운영한다 는 루머들이 확산되며 '원인제공을 했다' 는 여론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범죄는 나날이 진화하는데 정부의 대응은 이를 전혀 못따라 가고 있다. 치안, 복지 등 일상의 안전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사회서비스를 이행하는 국가에 세금을 내지만 정작 위기상황에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에서 쉴 때도 일 할때도, SNS에 얼굴 사진만 올려도 범죄의 표적이 되며 동시에 안전한 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더 이상 밤 늦게 돌아다녀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 라는 말이 유효하지 않다. 집에 누워만 있어도 표적이 되는 세상이다. 더 많은 피해자들이 자력구제를 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 법적 제도적 대책마련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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