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22. 김득근 일가

1919년 3월 무안 장터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만세시위를 이끌다 옥고를 치른 한 청년의 항일정신은 출옥 뒤 지역 청년운동으로 이어졌고, 다시 두 아들의 학생항일운동으로 계승됐다. 아버지는 3·1운동으로 감옥에 갔고, 장남은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 대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했으며, 차남은 이듬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해 역시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 주인공은 무안의 김득근과 그의 두 아들, 김영찬·김도찬이다.
이들 가족의 삶을 하나로 이어놓고 보면 그동안 서로 다른 사건으로 서술돼 온 무안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사이에 사람과 가족, 그리고 지역까지 연결하는 하나의 굵직한 흐름이 모습을 드러낸다.
1919년 3월, 서울 휘문의숙 학생이던 김한근은 서울의 3·1운동과 3월 5일 학생시위를 경험하고 고향 무안으로 돌아왔다. 김한근은 김득근의 사촌동생이었다.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온 김한근은 먼저 사촌 형 김득근과 거사 방안을 상의했다.
그리고 김한근은 신안 장산도로 건너가 장병준과 함께 3월 18일 만세 시위를 추진했다. 김득근은 정순홍, 박상규 등 지역 청년들과 뜻을 모았다. 후손 김청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좋은 김득근의 대나무밭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와 포고문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운동의 정보와 무안의 지역 조직이 사촌 간의 신뢰를 통해 하나로 결합한 것이다.
3월 20일은 무안 장날이었다. 오전 11시 무렵 김득근을 비롯한 시위대는 남산에 올라 독립경축식을 거행하고 무안보통학교와 장터를 거쳐 무안경찰서로 향했다. 여기에 학생과 주민, 농민과 상인이 합류했다. 식민권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경찰서 앞으로 시위대가 당당하게 나선 것이다.
일제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무안경찰서 병력만으로 진압하기 어렵자 목포경찰서와 헌병대까지 동원했다. 김득근은 체포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사촌 김한근도 같은 형을 받았다. 당시 김득근은 불과 27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감옥은 그의 항일의식을 꺾지 못했다.
1920년 4월 특사로 출옥한 김득근은 불과 몇 달 뒤인 그해 7월 창립된 무안청년회에서 식산부장을 맡았다. 1921년에는 재무부장, 1922년에는 서무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3·1운동 때 함께 옥고를 치른 안동선 등도 청년회에서 다시 만났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무안의 청년운동이 3·1운동과 단절돼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청년들이 출옥한 뒤 운동의 방법을 바꿔 계속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치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들은 계몽과 교육, 경제개선과 산업 장려, 구호와 생활개선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김득근은 수재민 돕기 성금을 내고 금주동맹 발기인으로 나섰으며, 『동아일보』 목포지국 무안분국장도 맡았다. 신문 분국은 단순한 신문 판매처가 아니었다. 전국의 새로운 소식과 사상을 지역에 전하고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밖으로 연결하는 근대적 공론장의 한 거점이었다.

당대 신문에서 김득근의 이름이 1920년부터 적어도 1924년까지 계속 확인되는 것은 그가 3·1운동의 ‘한때 참여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만세시위의 경험을 지역사회의 교육과 조직, 생활개선 운동으로 바꾸어 지속한 청년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 집에서 성장한 두 아들이 있었다.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5학년 이경채가 독립을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6월 체포되자 학교는 사법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그를 퇴학시켰다. 학생들은 분노했다. 당시 광주고보 5학년에 다니던 김득근의 장남 김영찬도 그 중심에 있었다.
1928년 6월 26일 학생들은 김영찬의 하숙집에 모여 대맹휴를 결의했다. 이경채의 복교뿐 아니라 교우회 자치권, 학생들의 교외집회 자유, 조선인 본위의 교육, 교장 사퇴 등을 요구했다. 김영찬의 하숙집이라는 장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방에서 광주로 유학 온 학생들에게 하숙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었다. 학교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로 생각을 나누고 행동을 논의할 수 있는 작은 공론장이었다.
이튿날 학교는 김영찬을 비롯한 주동 학생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졸업을 앞둔 5학년 김영찬에게 퇴학은 자신의 장래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맹휴를 성공리에 이끈 학생들은 다음달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해 맹휴, 시위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1928년 대맹휴의 경험은 이듬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사가 됐다. 한 학생에 대한 부당한 퇴학에 맞선 투쟁이 학교의 식민지 교육제도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했고, 학생들은 조직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익혀갔다.
흥미로운 것은 세대 사이의 닮은 모습이다. 1919년 아버지 김득근이 자신의 대나무밭에서 청년들과 태극기와 포고문을 만들었다면, 9년 뒤 아들 김영찬은 자신의 하숙집을 학생들이 모여 항쟁을 논의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버지 세대의 ‘대나무밭’과 아들 세대의 ‘하숙집’은 시대는 달랐지만 모두 저항을 준비한 비밀스러운 공론장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형 김영찬이 퇴학당한 지 불과 1년여 뒤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는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충돌을 계기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이때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동생 김도찬도 시위에 참여했다. 김도찬은 누구보다도 시위 참여가 가져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위의 형이 전년도 대맹휴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 김득근은 3·1운동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김도찬은 거리로 나갔고, 결국 퇴학당했다.
아버지의 옥고, 형의 퇴학, 동생의 퇴학. 식민권력이 한 가족에게 세 차례의 제재를 가한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제재는 저항의 기억을 끊어놓지 못했다. 오히려 앞선 세대의 경험은 다음 세대가 다시 행동하는 기억이 됐다.
김도찬은 오랜 세월이 흐른 2024년 10월 30일 모교인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일제가 학교 밖으로 내몰았던 학생에게 거의 한 세기 만에 학교가 다시 졸업장을 돌려준 것이다.

김득근은 두 아들이 모두 항일학생운동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후손은 그가 3·1운동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고, 결국 1933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증언한다.
지금까지 김득근은 무안 3·1운동의 수많은 참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영찬과 김도찬은 광주고보의 퇴학생 명단 속 인물로 각각 기록돼 왔다. 이들을 따로 보면 세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족의 역사로 연결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보인다. 바로 1919년 무안 3·1운동-1920년대 무안청년운동-1928년 광주고보 대맹휴-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운동의 계보다.

그 한가운데 김득근과 두 아들이 있다. 김득근의 사촌 김한근도 무안 3·1운동을 함께했고, 김득근 누이의 딸 정복해 또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백지동맹과 수업거부·시위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 집안의 항일운동은 부자 관계를 넘어 친족의 범위로까지 넓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민족의식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무안과 나주, 장성, 완도 등 각자의 고향에서 3·1운동과 청년운동의 기억을 접하며 성장했고 그 기억을 광주의 학교와 하숙집으로 가지고 왔다. 김득근과 두 아들의 삶은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1919년 아버지가 무안 장터에서 외친 독립의 함성은 10년 뒤 두 아들의 가슴에서 다시 살아나 광주의 교정과 거리로 이어졌다. 한 세대의 항일이 다음 세대의 항일을 낳았다. 그것이 김득근과 두 아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값진 역사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