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들과 함께 '이상향' 꿈꿨다···'보국안민' 기치 창시한 손화중

입력 2026.07.29. 10:54 수정 2026.07.29. 16:30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14. 손화중
손화중이 비결을 찾아낸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국가유산포털 제공

동학농민군의 첫 봉기는 1894년 3월 20일 무장기포였다. 1월 고부농민봉기, 3월 무장기포와 백산대회, 4월 황토현전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군의 봉기 과정을 살펴보면, 고부와 떨어져 있는 무장지역에서 왜 기포가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고부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전봉준은 왜 무장에서 다시 기포했을까?

이때 무장지역에서 수천 명의 교도를 거느리고 있었던 손화중이 주목된다. 손화중은 전봉준·김개남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남접의 핵심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밀양이고, 족보 이름은 정식(正植), 화중은 자(字), 호는 초산이었다. 그는 1861년 현재의 정읍시 상교동에서 손호열과 평강 채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씨는 유씨·안씨와 더불어 정읍의 3대 유력 양반가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된 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한 손홍록의 후예이기도 하다.

머슴을 몇 명 두었던 중농 이상의 촌부였던 손화중은 체격이 장대했지만 성격은 온화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정읍의 유력가문인 유씨 집안의 딸과 12세 때 혼인했다. 유학 공부를 깊이 하고자 지리산에 들어갔던 손화중은 훗날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주요 지도자 가운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동학에 입도했다. 무장 포덕 당시 선운사 석불에 숨겨진 비결을 꺼낸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손화중의 사상과 포교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손화중은 동학에 입도하기 전부터 민간신앙에 관심이 컸다. 그는 『정감록』에 나오는 피난처이자 이상향인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갔다가 경상도지역에 유행하던 동학을 접하게 되었다. 손화중은 포교활동을 하면서 민간신앙인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손화중이 주목한 것은 마음속으로 미륵을 생각하거나 미륵을 한 번 부르기만 해도 극락왕생한다는 미륵하생신앙이었다.

19세기 전후로 무장지역에는 민중들에게 미륵불로 불린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이 널리 확산됐고, 마을 곳곳에 미륵불상이 있었다. 여기에는 현세의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상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정감록』 또한 난국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개로 이용된 사상이었다. 손화중은 민중에게 익숙한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통해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게 했다. 이는 많은 민중이 동학에 입도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었다.

손화중은 교단으로부터 접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포교활동을 기반으로 무장에 남접 최초의 도소가 성립됐다. 손화중이 무장에서 세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892년의 ‘석불비결사건’이었다. 1892년 8월 무장의 선운사에서 손화중 휘하의 오지영·오하영·오시영이 교도들과 함께 도솔암 마애불에 숨겨져 있던 비결을 꺼냈다. 불교에서는 불상을 만들 때 그 안에 사리나 보화·경전 등을 안치하는 복장(腹藏)을 하는데,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에는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 비결사건 이후 많은 동학인이 투옥되었다. 이에 손화중 휘하의 동학교도들은 관아를 습격해 투옥된 사람들을 탈옥시켰다. 이를 계기로 전라도 일대에는 동학에 입도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상향’을 꿈꾸었던 민간신앙을 동학 포덕에 적극 활용한 손화중 휘하로 수많은 교도가 모여들었다. 천민과 승려집단까지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동학에 입도했다.

손화중은 1893년 3월 보은집회와 금구집회에 많은 교도를 이끌고 참여했다. 이어 무장의 대접주로서 10월에는 무장에 독립된 도소인 손화중포를 설치했다. 이는 교단에서 승인된 남접 최초의 도소였다. 1894년 무장에서 첫 봉기군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포교 기반과 조직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교도를 거느리고 있었던 손화중은 전봉준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여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무장포고문의 일부다.

“전국을 짓밟고 으깨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의 탐학에 참으로 이유가 있으니, 어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피폐해진다. 그런데도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輔國安民之方策)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온전히 할 방도를 도모하며 녹봉과 자리를 도둑질하니, 어찌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동학농민혁명의 기치인 ‘보국안민’이 처음 표방되고 있다. 무장기포에서 표방된 ‘보국안민’의 기치는 3월 26일 ‘백산대회’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손화중이 직접 세운 고창 도소. 국가유산포털 제공

“우리가 의를 일으켜 오늘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단단타(斷斷他)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반태산의 우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때부터 이미 반외세적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 중심에 손화중이 있었다. 황토현전투와 황룡천 전투 등 1차 봉기의 주요 전투에서 손화중이 이끄는 무장 출신 농민군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5월 초 전주화약이 체결되자 손화중은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광주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894년 6월 말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 점령으로 자진 해산한 농민군이 다시 일어났다. 앞서 살핀 순천에서는 최초의 전투부대인 영호도회소가 결성되는 등 남도 곳곳에서 동학농민군의 항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9월 10일 다시 봉기한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이끄는 부대는 공주를 향해 북상했고, 김개남은 청주를 향해 진군했다.

광주에서 활동하던 손화중 또한 삼례로 집결하라는 전봉준의 친필 서신을 받고 광주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로 향했다. 손화중은 그곳에서 전봉준과 함께 북상하다가 일본군이 목포 앞바다로 상륙해 동학농민군의 배후를 공격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나주성이 여전히 관군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군과 관군이 연결된다면 농민군은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 있었다. 무안 대접주 배상옥 역시 2천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북상하려다 같은 이유로 회군했다.

광주와 무안으로 내려온 손화중과 배상옥은 나주성 공략에 나섰다. 광주에 거점을 둔 손화중과 최경선은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농민군과 함께 나주성을 공격했다. 10월 15일 나주 방면으로 진군한 손화중 부대는 나주 동쪽 20리 지점인 침산과 송정리역 옆 선암, 나주 북쪽의 용진산에 진을 쳤다.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 농민군은 함평 고막포와 나주 문평 방면에 진을 쳤다.

양방향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나주 수성군은 대포를 앞세워 침산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을 선제 공격했다. 나주 수성군은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된 4월 조직됐다. 훗날 호남초토사가 된 나주목사 민종렬의 지휘 아래 도통장 정석진 등이 중심이 되어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석진은 동학농민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해남군수로 특진했다. 그리고 곧 발표된 단발령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다.

농민군의 나주성 공격은 1894년 7월 5일 나주대접주 오권선이 최경선과 함께 공격에 나선 것이 처음이었다. 이어 2차 봉기 때인 11월 13일 용진산 일대에서 농민군과 수성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이 제2차 나주성 공방전이었다. 수성군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을 압박했다. 농민군은 병력은 많았지만 대완포와 천보총으로 무장한 수성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1월 16일에는 수성군과 무안 농민군 사이에 고막포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4일 광주·나주 농민군은 수성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렀으나 패배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여러 차례 나주 수성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광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많은 손실을 입은 손화중 부대는 결국 12월 1일 해산했다.

한편 손화중은 고창과 인접한 흥덕의 이씨 재실에 은신해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군이 자수하지 않으면 아들을 대신 처형하겠다고 협박하자, 손화중은 재실지기에게 “그대가 나를 체포한 것으로 하여 포상을 받아라”라고 말하고 스스로 잡혀갔다고 후손은 증언한다. 재실지기는 손화중을 체포한 공으로 증산군수에 제수되었다 한다.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 넘겨진 손화중은 1895년 전봉준·김덕명·최경선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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