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에서 33세까지 30여명 26일 도청광장서 장엄한 출범
공수부대 만행에 분노 기동순찰대 활동중 너노나도 자원
7개초 편제…이름·주소 적힌 쪽지 호주머니에 넣고 결전
계엄군 공격에 3명 사망, 짜맞춘듯 내란죄로

1980년 5월26일 오후 3시 무렵. 전남도청 2층 사무실에서는 전투경찰용 방석모와 군인 헬멧을 쓰고 칼빈총을 든 30여명이 의식을 진행했다. 방석모와 헬멧에는 타격대를 구별하는 하얀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복장은 통일되지 않아 일부는 전투경찰복과 판초 우위 등을 입은 이들앞에서 한 사람이 선서문을 읽었다. 대표자가 선서문을 읽어갈 때 대원들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결의를 다짐하는 6개항을 복창하는 목소리는 우렁차고 광장을 덮었다. 이날 선서를 받은 이는 대장 윤석루, 선서자는 이재호였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이 2022년 발간한 '1980.5.27. 도청의 마지막 10일의 기억4-도청의 마지막을 지킨 사람들, 5·18 기동타격대 31인의 기억'에 기록된 광주민주화운동기간 공식적인 첫 무장조직 기동타격대 창설식 순간이다. 기동타격대 창설은 계엄군의 도청 재진입이 급박한 상황과 직결된다.
피의 항쟁 9일째인 26일 새벽 4시 계엄군이 광주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밀고 들어왔다. 시민군이 설치한 바리게이트를 깔아 뭉개고 농성동 한국전력앞길에 진을 쳤다. 시민군의 무전 보고를 들은 도청수습위원 중 17명이 도청에서 농성동 계엄군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4㎞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을 했다. 행진에 나섰던 김성용 신부 등 11명은 바로 전남북계엄분소로 가서 협상을 했지만 "자정까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도청을 비우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과의 최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최종 결정을 했다.
항쟁지도부는 이날 오전 새로운 전투조직인 기동타격대 편성을 공지하고 지원한 대원들을 중심으로 오후에 기동타격대를 창설했다. 죽음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예상에도 전혀 주저치 않고 수십명이 모였다. 기동타격대 창설은 이재호가 주도했다. 현역으로 군대를 마치고 한양공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5·18 당시 광주 금동에 '이림인테리어'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그는 공장에 있는 목재를 시위대의 시위용품으로 전부 내놓았다. 시위대를 후원하던 그는 계엄군의 시민 학살과 만행에 분노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핸드마이크로 시민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위대의 자유로운 총기 소지와 조작을 염려하고 체계적 총기 관리를 위해 25일밤 항쟁지도부와 상의 후 기동타격대 편성 계획을 날세워 수립했다. 개인 중심의 기동순찰대보다 조직적으로 대응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공수부대 만행을 목격하고 분노에 찬 이들이 무장 조직 편제 구성에 공감하고 앞다퉈 자원했다.
1조에서 운전을 한 양기남 씨(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무등일보와의 만남에서 "계엄군의 도청 진입이 임박해 죽음에 대한 공포에도 자원자들이 많았고, 시민군들 중에서도 모집 공고를 보지 못해 기회를 놓친 이들도 많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자원자들의 연령은 15세에서 30대까지 였다. 이재호씨가 33세로 가장 나이가 많고 유일하게 군대를 다녀왔으며 대학교육까지 마쳤다. 재수생을 포함해 고교생 5명도 있었지만 상당수 초·중학교 중퇴자였고 방위병도 있었다.

기동타격대 조직을 주도한 이재호씨 부인 얘기를 들어본다. 이재호씨는 고문 후유증 등으로 지난 2017년부터 언어장애로 의사 소통이 어려워 부인 이혜옥씨가 대신 무등일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재호씨가 기동타격대를 조직한 것은 그 당시 시민군을 비롯한 시위대들이 총기를 소지하는데 제약이 없다 보니 체계적 관리와 함께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모집했는데 많은 이들이 자원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군대를 다녀온 사람도 없고 힘없는 이들에게 많은 짐을 지게한 것같아 늘 안타까워했어요. 이후로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기동타격대에는 기혼자, 소년, 여성을 제외했지만 가장 어린 15세 안용순 등 10대들이 포함됐다. 동일실고 1학년 김재귀, 숭일고 1학년 마삼훈 등은 19일 귀가 도중에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하고 시위에 참여, 순찰대 활동중 모집 공고를 보고 기동타격대에 자원했다.
광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원자들의 의지는 강경했다. "큰 틀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이 우리 국민을 죽였으니, 나라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도 여기서 죽겠다"는 비장한 심정으로 지원했다는 별명이 '빼빼'인 이정태씨(당시 25세·7조)말처럼 대동소이했다. 눈앞에서 펼쳐진 공수부대 만행에 광주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는 자기 결정이었다. 광주농고를 졸업하고 나주에서 농사를 짓던 5조 대원인 남영관씨는 5월21일 광주역 인근 화물취급소 지하실에서 대검에 찔려 무참히 살해된 2명의 시신을 보고, 태극기로 덮어 리어카에 실고 도청을 향해 행진했다.(리어카 시위 행진은 광주역-시외버스터미널-금남로-도청으로 이어졌다)
나주 한독공고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를 꿈꿨던 2조 김삼규는 5월21일 학동에서 계엄군에 피격 사망한 형의 시신을 도청에서 확인하고 이성을 잃었다, "이건 전쟁이다. 나도 총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시위대에 합류한 것이다.
기동순찰대를 발전적으로 해체한 기동타격대는 대장-조장-조원의 편제로 급조됐다. 항쟁 지도부가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일원화된 체계를 갖춘 무장 조직이었다. 이름없는 노동자·농민 등 기층민중들이 항쟁 주체세력으로 당당히 나선 것이다. 대장은 24세인 윤석루였고 33세인 이재호는 부대장을 맡았다. 윤석루는 처음에 나이도 많고 기획력도 풍부하고 군대도 다녀온 이재호를 부대장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재호는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리더십과 통솔력은 대장님을 따라 갈수 없다"며 "조건없이 대장을 돕겠다"고 윤석루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재호는 기동타격대 선서문을 작성하고 낭독했다.
기동타격대 선서문은 광주의 자존심을 지키려한 기동타격대의 의지를 오롯이 담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시민군의 기동타격대로서 시민의 재산과 계엄군의 통태 파악 및 저지를 한다"고 도청 사수와 광주시민의 생명 보호를 선언했다.
기동타격대 규모는 80명설, 50명설, 40명설 등 다양하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대원간 기억에도 차이가 있고, 별명과 번호를 사용하고 급조돼 15시간 정도 공식 활동을 한 것에 그치다 보니 서로를 파악할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계엄사령부 공소장에 기록된 기동타격대는 30명이다. 지난 1982년 기동타격대동지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7조로 편제됐고 조당 5~6명으로 대장과 부대장을 포함해 43명이 편성됐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계엄군 진압작전때 3조 3명이 사망하고, 4조 3명도 도청에서 행방불명됐다. 이와함께 6조 '사무라이'로 통하는 이는 도청 진압작전 이후 전혀 소식을 알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로써 기동타격대는 공소장에 기록된 30명과 계엄군 수사과정에서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던 4명을 포함한 6명이 구술 작업과정에서 발굴, 35명이 최종 확인됐다. 이가운데 5명을 세상을 떠났다.
대원들은 대원증을 발급받았고 이름, 집주소, 연락처 등을 기록한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최악의 상황때 본인 시신이 가족에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기동타격대는 각자 번호를 매기고 별명을 쓰도록 했다. 예를들면 안용섭은 18번 다람쥐였다. 1조에서 운전을 한 양기남씨는 (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시계였다. 부대장 이재호가 운전원 특성상 시간을 잘지키라는 의미에서 붙어주었다고 했다. 깐돌이로 통한 4조 김공휴(5·18부상자회 국장)씨는 "시내에서 공수부대에게 두차례나 이유없이 구타를 당하다 보니 화가 많이 나 시위대에 합류했고, 타격대에서 공수부대에 전혀 지고 싶지 않은 생각에 깐돌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창설식을 마친 기동타격대는 각조 순찰 활동과 계엄군 동태 파악에 들어갔다.
구술자들의 얘기를 듣고 종합해 복원한 조별 순찰 구역이다. ▲1조(조장 이재춘) 지원동·방림동 방면 ▲2조(조장 박승열)교도소 방면 ▲3조 백운동·지원동·상무대 ▲4조(조장 이상범) 도청·장동·산수동·산수5거리·사방·양동·백운동 ▲5조(조장 도준식, 김기광) 금남로·터미털·농성동·도청 ▲6조(조장 박인수) 광주공원·대인동·도청 등이다. 7조(조장 김태찬)는 수송을 맡았다. 대원 차량에는 하얀 페인트로 타격대 글씨와 번호가 새겨졌다. 운전대 앞면에도 타격대 표시판을 부착했다.
조별로 구역 순찰을 마친 기동타격대는 이날 오후 6시께 최후의 만찬을 했다. 빙둘러 앉은 자리앞에 고작 주먹밥 한덩이를 놓고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짐했다. 저녁을 마친 이들은 자정 무렵까지 다시 두차례 순찰을 했다. 병력 수송업무 및 보급을 담당한 7조는 26일밤 YMCA에서 시민군 병력 30명을 계림초등학교 방면에 수송했다.
도청 항쟁지도부 상황실에는 시시각각 특이 사항이 기동타격대의 무전으로 보고 되고 있었다. 27일 새벽, 계엄군 진입이 시작됐다는 기동 타격대 보고를 받은 항쟁지도부는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시민에게 알렸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방송을 하는 여성의 피맺힌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질 때, 대다수 시민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둠에서 숨죽였다.
시민들의 목숨을 바친 강력한 저항에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이 6일만에 다시 광주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계엄군은 이날 새벽 3시30분 광주 시내 일원을 완전히 장악했다. 도청에서는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순찰에서 복귀한 4조는 도청에서 계엄군과 총격전을 전개했다. 5조도 자정이 넘어 금남로-터미널 방면 순찰을 나갔고, 6조는 자정이 넘어 출동하다 계엄군의 기습을 받아 조장 박인수가 목 관통상의 중상을 입었다. 3조는 자정이 넘어 도청 정문 화단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하다가 계엄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3조 대원 3명이 숨졌다. 이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도청 내부로 돌격한 3여단 특공조는 옥상부터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항복하라고 해도 나오지 않으면 수류탄을 던져넣었다.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씨가 북한의 최용해로 지목한 '광수 '양기남 기동타격대회장은 "지금은 없어진 옛 전남도의회 건물 지하에 민방공 훈련소가 있었는데 게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거기서 박병준 씨만 살아남았지만 대퇴부 등에 총알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나중 통합병원에서 박씨에게 들었는데, 거기에 사람이 더 있었는데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얘길했다"고 무등일보에 밝혔다. 박씨는 27일 도청에서 헬기로 통합병원에 후송됐다. 동이 터 오기 시작하는 오전 5시10분경 YM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등에 배치된 기존 시민군들도 진압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광주 사수의 비장한 결의로 창설된 기동타격대의 15시간에 이르는 짧지만 긴 활동도 종료됐다. 27일 계엄군의 진압 작전때 도청 16명을 비롯한 사망한 시민은 모두 25명이었고 체포자가 193명이었다. 기동 타격대원들은 도청을 비롯해 순찰 구역에서 체포됐다. 체포된 이들의 등에는 특수 폭도,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 등의 문구가 적혀졌고, 계엄사령부는 불과 15여시간 기동타격대로서 임무를 수행한 이들에게 짜맞춘 듯 내란죄를 적용했다. 또한 말로 상상할 수 없는 고문으로 이들의 존엄성을 완전히 짓밟았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박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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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갯벌에 '쪼개기 수법' 태양광 추진 사업자들 제동 일명 '쪼개기 수법'으로 갯벌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려던 사업자들에게 제동이 걸렸다. 이 사업자들은 소규모 태양광 발전시설은 환경영향평가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교묘히 파고들었지만, '서류상 다른 사업자라도 개발·운영이 연관돼 있으면 같은 사업자로 봐야 한다'는 법리 해석을 통해 환경영양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다.3일 영광군에 따르면 M발전소㈜ 등 59인(이하 사업자들)은 지난 8월 영광군 백수읍 상사리 1788번지 일대 112만8천680㎡에 164㎿ 태양광 발전시설을 30년 동안 허가를 신청했다. 사업자들은 전남도를 통해 전기사업법에 따른 발전사업허가를 받은 후 영광군에 각각 2~3㎿ 용량의 태양광 발전 설비 목적의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를 신청했다.태양광 발전시설 용량이 100㎿ 이상이면 환경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사업자들은 환경영향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이 곳에 각각 2~3㎿로 분리된 허가서류를 제출했다. 환경영향평가법은 한 사업자가 태양력 발전시설용량이 100㎿ 이상인 경우는 평가 대상이지만, 해당 사업자들은 수십명이 작은 발전 용량을 쪼개 신청해 관련 법을 피해갔다는 것이다.하지만 영광군이 환경부에 질의한 결과 "서류상 사업자가 다른 경우라도 개발·운영·관리 등이 연관돼 있다면 사실상 같은 사업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답변을 받아, 사업자들 모두가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환경부는 전기발전사업법에 따른 공사계획 인가를 하는 전남도가 승인기관이라 판단하고 있다. 반면 전남도는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 및 개발행위허가권이 있는 영광군이 승인기관이라는 입장이다. 영광군은 보다 확실한 행정·법적 판단을 위해 전남도 감사관실에 '사전 감사 컨설팅'을 요청한 상태이다.사전감사 컨설팅이란 공무원이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법령과 법규(지침)등이 불명확한 경우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유권해석을 제시하는 제도를 말한다이와 관련 임영민 영광군의원은 제 284회 제2차 본회의 주요 업무 보고를 통해 "160㎿ 이상의 대형 태양광발전 시설은 환경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사업자들은 환경영향평가를 피해보자는 속셈으로 이 곳을 59개 사업자로 쪼개 2~3㎿씩 군에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를 신청했다. 쪼개기 꼼수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임 의원은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갯벌 위에 태양광 발전 시설이 들어설지 모르지만, 환경부도 첫 사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전남도도 허가를 내준 채 지자체에 미루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광=한상목기자 alvt715@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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