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내달23일 프로·휴대폰 부문
제4회 '구례 화엄사 화엄매' 홍매화 들매화 프로사진 및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가 오는 25일부터 내달 23일까지 열린다.
이번 사진 콘테스트는 지난해보다 2주 빠르게 시작한다. 기후 변화로 홍매화 개화시기가 빨라졌기 때문.
올해부터 달라지는 점도 많으니 꼭 참고해야한다. 촬영 장소 다툼 등으로 인해 이른 새벽 시간 방문하는 촬영객들이 늘어 스님들의 기도시간, 준비 시간 등을 마련하기 어려워져 홍매화 촬영 산문 개방 시간과 마치는 시간도 생겼다. 개방은 오전 5시30분부터이고 문을 닫는 것은 오후 8시30분이다.
또 홍매화를 보호하기 위해 가지를 잡고 촬영하는 것을 금하며 나무 밑에서 뿌리를 밟아 홍매화가 훼손된 바 있어 보호를 위한 포토라인을 설치한다. 스님 초상을 허락 받지 않고 몰래 촬영하는 것 또한 금지된다. 대신 스님들의 홍매화 포토타임 울력 촬영 시간을 내달 2일 오전 7시30분, 9일 오전 7시30분, 16일 오전 7시30분 세 번에 걸쳐 마련했다.
심사위원으로는 국내 언론사 사진 담당 부장으로 구성됐다. 심사 기준은 작품성(30%), 완성도·심미성·활용성(30%), 대중적 흥미도·홍보 활용 가능성 및 적합성(20%), 공모전 기획 의도 부합성·독창성·창의성·메시지 전달력(20%) 이다. 동점 경우 작품성과 활용성 순으로 고득점자 순위를 정하고 모두 동일한 점수일 경우 심사위원회에서 최종 순위를 결정한다.
출품은 화엄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프로사진 부문, 휴대폰 사진 부문에 촬영한 사진을 개인당 1작품씩 화엄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올리면 된다.
수상작은 전문가 사진 부문은 총 4명을 선정한다. 모두 동일하게 상장과 템플스테이 1박2일권이 주어지며 상금은 ▲총무원장상 200만원 ▲포교원장상 100만원 ▲교육원장상 100만원 ▲교구장스님상 100만원이 수여된다.
휴대폰 사진 부문은 총 6명을 선정하며 모두 동일하게 상장과 10만원 상당의 화장품세트, 템플스테이 1박2일권이 주어진다. 상금은 ▲교구장스님장 50만원 ▲부주지스님상 30만원 ▲총무국장스님상 20만원 ▲교무국장스님상 20만원 ▲포교국장스님상 20만원이 수여되며 ▲불교리더스포럼 상임대표상에는 부상 50인치 TV가 선물로 주어진다.
또 전문가 출품작 25명, 휴대폰 카메라 출품작 25명 등 총 50명에게 치킨 상품권을 개인당 3장씩 증정한다.
모든 사진 콘테스트 출품작과 수상작 저작권은 화엄사와 구례군에 귀속된다. 수상작은 화엄사와 구례군 홍보관련 사진으로 채택, 사용되며 출품작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경우 화엄사와 구례군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시상식은 부처님오신날인 5월15일 오전 10시 각황전에서 펼쳐진다.
한편 내달 9일 오후 1시 각황전 앞 홍매화를 배경으로 국가유산 천연기념물 지정 행사가 열린다. 최응천 문화재청장, 김영록 전라남도 지사, 김순호 구례군수, 유시문 구례군의장, 덕문교구장스님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화엄사 연합합창단과 소프라노 문안나, 테너 김현우가 축가를 부르고, 현중순의 시 '거룩한 법신 홍매화여'를 시낭송 전문가 김태정이 홍매화 축시로 낭독한다.
구례=오인석기자 gunguck@mdilbo.com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 · 日어선 습격···육지서 못다한 항일투쟁, 바다서 맹위 떨쳐
- · 영암 의병, 조국 독립을 위해 민족의 魂을 깨우다
- · 임진왜란부터 한말 의병전쟁까지 빛나는 대일항전
- · 거병 또 거병···구례를 빛낸 '조직의 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