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총 800조 원을 투자해 광주 군공항 종전부지에 반도체 팹(fab) 4기를 짓기로 확정됐다. 현 정부 ‘3대 메가프로젝트’의 하나이자, 정부 한 해 예산을 웃도는 초대형 투자다. 수도권과 충청권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 반도체의 남방한계선이 처음으로 호남까지 내려온, 지역 산업사의 일대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선은 환호가 잦아든 다음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투자 ‘발표’가 곧 지역의 ‘번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에는 800조 원이 광주 한 지점의 생산기지로 소비되고 소재·부품·장비도 일자리도 끝내 역외에 남는 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자본이 통합특별시 전역의 산업생태계로 퍼져 지역의 100년 먹거리로 뿌리내리는 길이 있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지금의 설계가 결정한다.
첨단 반도체 팹은 고도로 자동화된 장치산업이다. 투자 규모는 압도적이지만, 그에 비례해 직접 고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 천문학적 투자액의 대부분이 사람이 아니라 극자외선(EUV) 노광기 같은 초고가 장비와 클린룸 설비에 투입되고, 정작 생산 현장은 소수의 고숙련 엔지니어가 자동화 라인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팹 몇 기가 들어섰다는 사실만으로 인구소멸 위기의 전남광주에 청년 일자리가 쏟아진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절반의 기대에 불과하다.
진정한 낙수효과는 팹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후공정, 그리고 연관산업의 ‘두께’에서 나온다. 만약 광주에 팹만 우뚝 서고 소재·부품·장비 일체를 수도권과 해외에서 조달한다면, 통합특별시는 물량을 찍어내는 하청 생산기지에 머물 뿐 ‘산업수도’가 되지 못한다. 팹을 세우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팹이 지역에 뿌리내리느냐는 결국 이를 둘러싼 산업생태계를 얼마나 촘촘히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광주의 지능(知能)과 전남의 자원(資源)을 하나로 엮을 공간적 조건이 갖춰져 있다. 팹을 한 점에 가두지 말고, 통합특별시 전역을 잇는 ‘반도체 트라이앵글’로 재설계해야 한다.
첫째, 광주는 ‘두뇌’다. 전공정 팹과 설계, 그리고 AI 중심도시로 쌓아온 연산 인프라·R&D 역량, 지역대학의 인재를 결합해 트라이앵글의 사령탑으로 삼는다.
둘째, 서부권 에너지밸리는 ‘심장’이다. 전국 최대의 태양광·해상풍력 집적지인 전남의 무탄소 전력은 24시간 무정전을 요구하는 팹의 가장 확실한 해법이자, 글로벌 기업의 RE100 조건을 충족시키는 무기다. 나아가 그 전력을 제어하는 ‘전력반도체’ 자체를 서부권 특화산업으로 육성해, 에너지가 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동부권 산단은 ‘뼈대’다. 여수 석유화학과 광양 철강이 쌓아온 소재 기술을 반도체용 고순도 소재와 특수가스로 전환하면, 광주 전공정 팹의 후방 수요를 역내에서 충족하는 자족형 공급망이 완성된다.
여기에 후공정·패키징 클러스터와 융합형 전문인력 양성을 더해야 한다. 팹 유치와 동시에 후공정 기업을 집적시키고, 지역대학·연구기관과 연계해 반도체 인재가 지역에 머무는 정주 생태계를 짜야 한다. 서부권 전력과 동부권 소재가 광주의 팹으로 모이고, 그 성과가 다시 권역으로 퍼지는 구조. 이것이 통합의 부작용인 ‘광주 쏠림’을 막고 소외 없는 균형발전을 완성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800조 원의 투자 계획이 발표되고 부지까지 확정됐지만, 국가산업단지 지정과 세부 투자협약, 인허가 같은 후속 절차는 이제부터다. 협력업체를 어디에 배치할지, 어떤 조건으로 지역에 뿌리내릴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그 공급망을 수도권이 아닌 전남 서부·동부 권역으로 함께 이끌 수 있는 협상의 창(窓)이다. 마침 통합특별시는 반도체전략위원회와 산업지원단을 출범시켜 부지·인허가·전력·용수의 ‘원스톱 지원’에 나섰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앞으로 맺을 세부 투자협약과 지원 패키지 안에 ‘1·2차 협력사의 역내 동반 입주’와 ‘지역대학 계약학과와 연계한 지역인재 채용’을 함께 담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팹의 착공은 곧바로 권역 곳곳의 소부장 공장과 청년 일자리로 번져, ‘고용 없는 팹’은 지역의 일자리로, ‘광주 쏠림’은 권역의 상생으로 바뀐다.
행정통합의 진짜 성패는 800조라는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숫자가 전남 서부의 어느 포구와 동부의 어느 산단에까지 스며드는 촘촘함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광주의 지능과 전남의 자원이 트라이앵글로 결합하고 그 안을 지역의 기업과 사람이 채울 때,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비로소 수도권 일극 체제를 깨는 제2의 반도체 수도로 우뚝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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