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와 전남의 통합은 이제 추상적인 구호를 넘어 구체적인 제도 설계의 단계로 진입했다.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어서면서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더 이상 “통합을 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제 본질적인 질문은 “어떤 가치 위에, 누구를 위한 도시를 만들 것인가”여야 한다. 수도권 일극 체제 대응과 지방소멸 위기 돌파라는 전략적 목표는 분명하지만, 통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통제 없는 권력 집중, 지역 간 격차 심화, 민주주의보다 앞선 개발 지상주의는 발전이 아니라 퇴행을 불러올 뿐이다.
이 중차대한 기로에서 우리는 다시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불러와야 한다. 2000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그가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헌신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을 강조하며, 정치의 핵심 키워드를 민주, 인권, 평화로 요약했다. 전남·광주 통합시가 진정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가치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도시의 ‘헌법’이자 행정의 실질적인 원리로 작동해야 한다.
김대중 정신의 핵심은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시민의 크기에 있다. 그의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절차를 넘어 시민이 권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질서였다. 따라서 통합시 설계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통합특별시장의 권한이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시민이 그 권한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감시하고 개입할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 전남·광주 통합시의 첫 번째 원리는 ‘민주주의의 확장’이어야 한다.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을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4~5년에 한 번 투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민이 예산의 우선순위를 제안하고 개발계획을 감시하며 생활권 정책을 논의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광역 차원의 주민참여예산, 시민배심원단, 숙의형 공론장을 특별법과 기본조례 수준에서 제도화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생활권 자치’의 강화다. 광주의 5개 자치구와 전남 22개 시군은 역사와 산업구조, 생활의 결이 모두 다르다. 광역 전략과 재정은 통합하되, 돌봄·문화·기초교통 등 생활 밀착형 영역은 권역별 자치를 강화해 주민이 자기 지역의 문제를 직접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통합이 시민 위에 서는 순간, 그 통합은 이미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숨기지 않는 행정’을 위해 모든 개발계획과 예산 집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개플랫폼을 갖춰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두 번째 대원칙은 ‘인권의 행정화’다. 김대중의 인권은 차별과 가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정치였다. 통합의 성과는 GRDP(지역내총생산) 증가율이나 투자유치 금액만으로 측정될 수 없다. 어느 지역에 살든 최소한의 의료, 교육, 교통, 돌봄서비스를 누릴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현재 광주와 전남은 같은 생활권임에도 필수 의료와 대중교통 등에서 격차가 적지 않다. 특히 농산어촌과 도서 지역은 중층적인 소외를 겪고 있다. 진정한 인권 도시는 대형 개발사업보다 ‘인간다운 삶의 최소선’을 보장하는 도시여야 한다.
광주가 축적해온 인권헌장, 인권영향평가, 인권옴부즈맨 제도를 통합시 행정 전반의 기준으로 확장해야 한다. 바르셀로나나 영국의 요크처럼 인권을 지방정부의 일상적 정책 원리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대형 프로젝트에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를 묻는 인권 및 사회영향평가를 의무화해야 한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행정, 그것이 바로 김대중 정신의 계승이다.
세 번째 원리는 ‘평화의 제도화’다. 김대중에게 평화는 상대를 제거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질서였다. 전남·광주 통합시가 지향해야 할 평화는 ‘흡수’가 아닌 ‘공존’이어야 한다. 그간 혁신도시, 군공항 이전, 산업기반 배치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통합만 한다고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 설계하면 중심부의 이익만 강화되고 주변부는 ‘내부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갈등을 사전에 조정하고 관리할 상설 갈등조정기구를 제도화해야 한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PEACE IV’ 프로그램이나 콜롬비아 보고타의 ‘기억·평화·화해센터’ 사례처럼, 갈등을 정책 의제로 다루고 역사적 상처를 사회적 학습의 자산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광주의 5·18 정신과 전남의 공동체·생태 자산을 결합해 민주·인권·평화 교육도시로 성장할 때 통합시는 강력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결국 전남·광주 통합시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조직개편이 아니라 ‘가치를 제도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다음의 일곱 가지 과제를 제안한다.
민주·인권·평화를 통합시 기본헌장과 조례의 상위 원칙으로 명시할 것. 지역별 특색을 반영한 생활권 자치 보장 장치를 마련할 것. 광역 주민참여예산과 시민숙의제를 법정화할 것. 모든 대형 사업에 인권 및 사회영향평가를 의무화할 것. 권역별 균형발전 특별회계를 통해 인구감소 및 소외지역에 우선 투자할 것. 민주·인권·평화교육 플랫폼을 설치해 김대중·5·18 정신을 생활 규범화할 것. 군공항, 환경 등 첨예한 갈등을 다룰 상설 갈등조정기구를 설치할 것.
특히 ‘균형발전’과 ‘갈등조정’은 평화로운 통합을 위한 양 날개다. 예산과 권한이 한쪽으로 쏠리면 통합의 동력은 상실된다. 투자의 문제를 경제성 계산이 아닌 ‘정의의 문제’로 다루어, 기준 미달 지역에 대한 우선 투자 원칙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야 한다.
전남·광주 통합시는 단순히 규모가 큰 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행정 단위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광주의 민주주의와 전남의 생물다양성 및 농산어촌 자산을 결합한 ‘사람 중심 발전 모델’을 전 세계에 보여주어야 한다. AI와 미래 산업도 중요하지만, 그 기술이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성장이어야 한다. 개발의 속도보다 시민의 품격이 앞서고, 경쟁보다 상생의 제도가 강한 도시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권한 집중과 개발 속도전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시민주권과 인권보장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 것인가. 후자의 길만이 시민이 자랑스러워하고 오래 지속되는 통합을 가능케 한다. 김대중의 정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강한 지도자의 도시’가 아니라 ‘강한 시민의 도시’를 만드는 일이었다.
통합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시민들은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 통합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훼손되지 않도록, 개발의 이름으로 인권이 밀려나지 않도록, 효율의 이름으로 평화가 희생되지 않도록 묻고 감시해야 한다. 특별법 조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공유할 ‘가치의 헌법’이다. 규모의 확장이 아닌 존엄의 확장으로, 행정의 통합이 아닌 공동체의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가 깊고, 인권이 넓으며, 평화가 구체적인 도시. 그것이 바로 김대중의 이름으로 설계되어야 할 전남·광주 통합시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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