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를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1980년 5월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역사적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권력이 시민의 생명과 존엄을 억압하던 시대에, 평범한 시민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나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몸으로 증명한 민중항쟁이었다. 총과 탱크로 상징되는 국가폭력 앞에서 광주의 시민들은 침묵이나 순응이 아니라 연대와 저항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수많은 희생을 동반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당시 군사독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죄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며 공포정치를 극대화했지만, 광주 시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한 정치인의 생존을 넘어, 민주주의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거리에서, 일상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는 특정 인물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권력 위에 시민이 존재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려는 집단적 선언이었다.
이 경험은 오늘날에도 광주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광주의 민주·인권·평화는 과거의 기억에 머무는 박제된 가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적 불의와 차별, 폭력에 맞서 작동되어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기준이다. 광주는 희생의 도시이기 이전에, 시민의 용기와 연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 도시이며, 민주주의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증거다. 이러한 역사적 축적 위에서 광주는 오늘도 민주·인권·평화라는 이름을 현재와 미래의 언어로 갱신해 나가야 한다.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와 이에 대한 국회의 해제 결의는, 민주주의가 한순간의 판단과 권력의 선택에 의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헌정 질서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민들에게 1980년 5월의 공포를 겹쳐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제도는 작동했고, 시민들은 역시 침묵하지 않았다. 헌법적 절차와 시민의 감시,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결합되면서 위기는 통제됐다.
이 경험은 민주주의가 결코 그냥 주어지고 유지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와 시민의 지속적인 실천 위에서만 비로소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줬다. 이 지점에서 광주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진다. 5·18 이후 "한을 보복이 아닌 민주 회복으로 풀자"고 호소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과거를 위로하는 문장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행동하는 시민들에 대한 요청이다. 이제 광주는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도시를 넘어, 일상의 선택과 제도, 정책과 공동체의 실천 속에서 민주주의를 살아내는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 기조는 국민주권의 실질화, 민주주의의 일상화, 사회적 연대의 복원이다. 이는 중앙 정부의 선언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지방정부의 정책으로 구체화 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광주는 이미 민주·인권·평화 도시 조례와 인권 전담 부서 설치 등 제도적 기반을 갖춘 도시다. 이제 과제는 이 가치들을 시민의 삶 깊숙이 스며들게 만드는 일이다.
이와 맞물려 최근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광주·전남통합 역시 단순한 행정구역 개편이나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간을어떻게 확장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광주·전남은 5·18민주화운동과 민주화 이후 지역 정치의 궤적을 함께 공유해온 공동의 역사적 공간이다. 통합 이후의 광주·전남은 행정규모가 커지는 것이 그칠 것이 아니라, 민주·인권·평화라는 가치가 더 넓은 지역 공동체의 일상과 정책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통합이 중앙집중적 권한을 키우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면, 그것은 광주가 지켜온 민주주의의 정신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통합이 주민 참여와 자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면, 광주·전남통합은 지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첫째, 생활 속 민주주의 인프라를 좀 더 촘촘히 구축하고 국민주권의 일상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 규모를 확대하고, 참여위원회의 성별·연령·직업·사회적 약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대표성을 제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중기재정계획 수립 단계부터 주민 의견이 반영되는 숙의 과정을 도입해 예산 전 과정에 걸친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광주·전남 통합 이후에는 동 단위, 군 단위까지 연결되는 참여 구조를 설계해, 광역단위 정책이 생활 단위 민주주의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국민주권을 투표일에만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라, 일상에서 실감하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다.
둘째, 고립을 줄이는 관계 중심 정책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복원해야 한다. 노인과 청년의 고독, 농촌과 도시 간 단절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구조적 위험이다. 관계가 단절된 고립된 개인은 불안과 분노에 노출되기 쉽고 혐오와 음모론, 극단적 정치 선동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광주·전남 통합은 이러한 단절을 완화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세대와 지역이 섞이는 공동체 공간, 관계성 돌봄 인력 확충, 생활권 기반 소통 프로그램은 복지 정책이자 민주주의를 지키는 예방 정책이다.
셋째, 시민교육은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전략이다. 혐오 발언과 부정선거 음모론, 극단적 정치 선동은 처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토론 능력, 허위 정보 판별력, 다른 의견과 공존하는 규칙을 배우는 민주 시민교육이 상시화될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특히 AI시대의 허위조작정보에 대응하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광주·전남 통합 이후 광역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할 공공 과제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비용 대비 가장 효과적인 투자가 될 것이다.
넷째, 대학은 지역 민주주의 역량을 강화하는 핵심 거점이 되어야 한다. 광주와 전남의 대학들이 지역 현안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시민사회와 연결될 때, 통합은 행정 통합을 넘어 지식과 시민 역량의 통합으로 확장될 수 있다.
광주 혹은 광주·전남통합 도시의 다음 20년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작은 제도의 정교함과 관계의 회복에서 결정된다. 고립되지 않는 시민, 혐오보다 대화를 선택하는 공동체, 지식이 공동선을 향하는 도시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꿈꾸었던 민주주의의 다음 걸음이다. 광주와 전남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기반으로, 이재명 정부의 국민주권 실질화·민주주의 일상화·사회적 연대 복원이라는 국정 기조에 발맞춰 광주·전남통합 이후의 지역 민주주의 모델을 선도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과거형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삶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시, 그것이 광주가 다시 증명해야 할 '민주·인권·평화'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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