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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달구벌의 세월, 한눈에 둘러본다

입력 2023.01.12. 15:47 나윤수 기자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
33.대구역<2>대구 여행 1번지 '골목 투어'
대구시내 중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기거하던 곳으로 선조 34년(1601년)에 설치됐다. 선화당과 징청각 등의 역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주변 직장인들의 산책 장소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광주에서 대구까지 미리 달려본 달빛내륙철도] 33.대구역<2>대구 여행 1번지 '골목 투어'?

대구시는 원래 읍성이 둘러싼 성곽도시였다. 읍성을 둘러싼 동서남북 도로가 지금의 4성로다. 대구 중심부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가 그것이다. 현재 도로가 있는 자리는 읍성이 빙 둘러 자리하던 곳이었다. 대구 골목투어는 이 4성로를 걷는 여행이다. 사라진 읍성을 따라가는 길인 것이다.

어느 도시나 문제적 인물은 있다. 대구의 상징 읍성을 없애버린 인물이 경북관찰사 서리 친일파 박중양이었다. 대구 읍성은 임진왜란 두 해 전인 1590년 쌓았다가 임란으로 파괴된 것을 1736년 석성으로 재건축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박중양이 불법으로 철거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상권이 들어서 오늘날 대구 도심을 이루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대구시 여행의 1번지 '근대로(路)의 여행'은 2001년 시민단체가 아이디어를 내 처음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 대구시 중구가 본격화해 지금은 다섯 개 코스(경상감영달성길·근대문화골목·패션한방길·삼덕봉산문화길· 남산100년향수길)로 세분화해 운영 중이다.

경상감영의 관찰사가 집무를 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귀중한 자료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달구벌의 그때 그시절 담긴 경상 감영달성길

오랫동안 대구 읍내 중심지는 경상감영일대였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찰하던 곳으로 지금의 도청과 같은 기관이다. 그러니 대구 근대사를 조명할 출발지로써 경상감영이 제격이다. 대구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은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다. 1970년대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했다가 1997년 공원내 문화재들을 정비해 '경상감영 공원'으로 이름을 바꿔 공원화했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에는 경주에 있었다. 그 후 상주와 안동을 거쳐 1601년 (선조 34년)에 대구로 옮겨왔다. 경상도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경주의 경, 상주의 상을 따서 경상도가 된 것이다. 조선 초만 해도 대구는 경주와 상주보다 작은 고을이었다.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기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으니 대구시는 감영 이전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대구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도록 조성된 박물관으로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됐다.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근매문화유산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경상감영 곁에 있는 대구근대역사관은 대구 민중 수탈의 원흉 조선식산은행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됐다가 광복 후 한국 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2011년 대구시가 근대역사관으로 개조해 문을 열었다. 건물 자체는 화강암 르네상스식이어서 한껏 고급스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아픔의 현장이다. 1927년 장진홍 의사와 애국 시인 이육사가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과 관련해 옥고를 치른 건물이 바로 이 건물이다. 현재는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전시관에 6·25 전쟁과 2·28민주화 운동 등 대구의 근대 자료를 전시 중이다.

대구근대역사관은 대구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도록 조성된 박물관으로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됐다.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근매문화유산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과거와 현재의 만남

대구 근대거리 투어는 2코스 '근대문화 골목'에서 본격화된다. 동산 선교사 주택~화교협회(소학교)까지 약 1.64㎞거리에는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심부가 약령시(약전 골목)다. 600여m 거리 약령시는 조선시대 최대 약재 시장이었다. 조정에 진상할 약재를 수집하거나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조성된 거리로 추정된다. 서양의학의 발달로 과거 영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약령시는 여전히 전국 최대 한약재 시장이다.

약령시 입구에 유난히 빨간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33년 지어진 경북 최초 교회 건물 대구제일교회다. 뾰족하게 뻗은 종탑과 아치식 고딕양식이 이채롭다. 대구 제일교회는 근대 건축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교회당 계단에 두 개의 성화가 그려져 있는데 두 번의 화재에도 멀쩡해 불타지 않는 성화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구 제일교회 기단부 돌은 대구 읍성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시민 몇몇이 그 정기를 잇고자 교회 기단용으로 빼돌린 것이라고 한다. 하잖은 것처럼 보이는 돌무더기 기단 하나에도 민족정기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약령시 끝에서 계산성당을 만난다. 1902년에 완공된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대구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내부에는 최초 신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한국 성인들이 장식돼 있어 한국 천주교도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계산성당으로 가는 길에 일제 시대 대표적 저항 시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고택과 국채 보상 운동을 일으킨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보존돼 있다. 조선 말기 나라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는 국채보상 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선생 고택에는 대구 국채보상정신을 이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현재도 이뤄진다.

3·1만세 운동길 대구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서학당 재학생들이 가파른 언덕 90계단을 지나 집결지인 큰 장터로 향했던 '3·1 만세길'이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근대 역사의 산실 3·1만세 운동길과 청라언덕

계산성당 맞은편 길이 '3·1만세 운동길'이다. 대구는 서울보다 일주일이 늦은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성서학당 재학생들이 이곳을 지나 집결지인 큰 장터로 향했다. 가파른 언덕 90계단이 '3·1 만세길'이다. 계단 언덕을 오르면 청라언덕에 닿는다. 담쟁이덩굴이 많아서 청라언덕이라 했다. 청라언덕 위에는 선교사 주택 '스윗즈·챔니스·블레어' 주택 3동이 남아 있다.

청라언덕은 20C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됐다. 이곳에 선교사 주택 '스윗즈·챔니스·블레어' 주택 3동이 남아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청라언덕은 20C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거주하면서 담쟁이를 많이 심은 데서 유래됐다. 청라언덕에 동무생각 가사가 적힌 시비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선교사들은 구한말부터 청라언덕 위에 자리 잡고 살았다. 언덕배기에 최초의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는 걸로 봐서 예전에는 농사도 지었을 것이다. 선교사 주택은 한식과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현재 스윗즈 주택은 선교 박물관,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물관으로 각각 역할을 달리해 운영 중이다.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 고풍스러운 자태는 드라마촬영지, 결혼사진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사과의 시조나무를 찾아서

사과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코커서스 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 초 대구에서 최초 재배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사과를 능금이라 했다.

대구 사과나무의 시조격인 능금 나무 시조목 3세들, 세 그루가 청라언덕에 남아 있다. 임정옥기자 joi5605@mdilbo.com

능금과 사과는 종자가 다르다고 하지만 능금하면 일반적으로 옛날 사과를 말한다. 지금이야 전국적으로 사과재배가 일반화 됐지만 예전에는 사과하면 대구였다. 대구사과는 1899년 10월 미국 선교사 아담스(안의와)와 존슨(장인차)이 미국 미주리주에서 몇 그루를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였다. 아담스는 계성학교 설립자이고 존슨은 동산의료원 설립자로 헐벗은 대구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면하게할 과일로 사과를 지목하고 들여온 것이다. 그때 들여온 처음 사과(능금)가 청라언덕에 남아 있다. 대구 사과는 일본인들이 금호강 주변에 사과 과수원을 조성해 대규모로 재배하면서 크게 번성했다. 1960년대는 전국 생산량의 87%를 차지할 정도로 대구하면 사과의 고장이었다.

사과나무의 시조격인 능금 나무(사진)

청라언덕에 남아있는 사과나무의 시조격인 능금 나무(사진)가 각별한 소생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사해 밑동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앞의 세 그루는 시조목의 3세들이다. 비록 시조 나무는 고사하고 없지만 굶주린 대구 시민들을 생각한 선교사들의 따뜻한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고 시조목을 지키고 있다.

나윤수 객원기자 nys2510857@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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