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잡학카페
얼음 빙하에 갇힌 한 척의 배가, 100년의 바다를 건너 오늘날까지 항해하며 리더십이라는 등불을 후대에 밝히고 있다. 비록 목적인 남극 횡단 탐험은 실패했으나, '인듀어런스(Endurance)'는 실패 속에서 위대한 교훈의 나침반이 되었다. 1914년,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서로 다른 분야의 27명의 대원과 함께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남극 횡단 탐험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남극에 도착하자마자, 바다는 부빙(떠다니는 빙하 조각)과 두꺼운 얼음으로 인해 봉쇄되었고, 범선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섀클턴은 배를 버리고 대원들과 함께 고행을 견뎌내며 15개월간의 극한 생존 끝에 28명의 대원 전원이 무사히 구조되었다.
이 놀라운 생존기에는 사진사로 참여했던 한 대원의 노력도 있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무거운 사진 원판 200장을 끝까지 지켜냈고, 덕분에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사건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이것은 기록이 단지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되고 의미화되는가'가 핵심임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다.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다음을 향한 새로운 문임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기억의 기록'은 과거를 넘어 현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인간의 소중한 유산이다.
기억은 느낌을 만들고, 느낌은 감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기억이 없으면 눈물도 없고, 감정도 사라진다. 기억은 행위와 행동의 뿌리이다.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행위는 기억에서 비롯되며, 기억이 바로 기대를 낳는다. 과거의 역사를 잊은 기억상실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는 자기 상실이다. 과거 그 자체가 현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현재의 기억이 미래를 만들어낸다. 5·18이 2024년의 비상계엄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5·18의 '주먹밥'과 '소년이 온다'를 기억한 시민들이 오늘을 살려낸 것이다. 승리의 역사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좌절과 은폐된 역사를 기억하고 되살리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공동체가 지속되는 이유다. 기억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수많은 민족과 국가, 대기업과 명문가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억의 중요성은 최근 두 대통령의 행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대통령은 취임 첫날, 국회에서의 공식 행사 후 가장 먼저 국회의 청소 노동자 여성들을 만났다. 이 선택에는 상징성이 있다. 비상계엄과 해제의 충돌 지점인 국회에서, 뒤처리를 맡은 이들의 수고를 위로하며, 동시에 '비상계엄을 청소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실은 이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대통령 개인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청소부였고, 여동생은 새벽 청소 중 과로로 사망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억의 부채 의식'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삶을 대표하는 이들을 찾은 것이다. 대통령의 과거를 아는 시민들은 그 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전직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당시, 위패도 사진도 없는 조화 앞에서 무표정하게 참배했다. 이는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의 모습이다.
최근 비상계엄을 포함한 비극의 역사 속에서, 자국민이 자국민에게 가한 고통을 은폐하거나 봉인하려는 시도는 '기억상실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이는 외부의 침략이나 압력에 맞설 공동체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기억의 백신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지난 비상계엄에서 대선까지의 반년을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개인, 전문가, 역사학자, 문학인, 예술가, 철학자 등 다양한 이들의 기록이 미래에 다시 꺼내질 '타임캡슐'이 되는 것이다. 기억만이 현재와 미래를 구할 열쇠이며, 기억하기 위해 남긴 기록을 다시 열어볼 '키'를 넘기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뗏목 위의 역사의 동행자들이다. 비상계엄이라는 거센 폭풍으로부터 대선이라는 소용돌이까지, 그 지난한 반년의 여정을 어떻게 항해했고, 어디에 닻을 내릴지를 기록하는 일은 우리 각자의 나침반이자 항해일지다. 저마다의 눈으로 본 어두운 하늘과 죽음의 파도를 남긴 글과 예술, 사유하는 철학이 훗날 다시 열릴 '기억의 병 속 편지'가 된다. 기억은 바다 위를 밝히는 등대이고, 기록은 그 불빛을 다시 켜는 불씨이다. 불씨를 넘기지 않는다면, 등대는 어둠에 묻히고, 우리는 길을 잃는다.
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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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AI 융합 교육의 시작은 창의적 逆發想-(55) 전 정부의 교육부장관은 '500만 학생을 위한 500만 개의 교과서'라는 구호 아래, 올 1학기부터 AI 디지털교과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교과서'가 아닌 '교육자료'로 격하되었다. 이유는 '학생의 창의력'보다 '국·영·수 중심의 성적 향상'이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AI 인재 양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어떤 AI 교과목을 도입할 것인가?', '어떤 분야의 AI 교수를 채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현재 국내 대학에서 이뤄지는 AI의 교과목과 교수 채용은 대체로 컴퓨터공학 중심이다. 최근 AI 개념이 LLM(초거대언어모델),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과 같은 컴퓨터공학 기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AI 소버린(Sovereign AI)'처럼 국가 차원의 독립적 AI 생태계 구축은 전략적으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컴퓨터공학의 영역이다.그러나 이러한 공학 중심적 접근만으로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새로운 AI 시대에 필요한 교육 혁신은 '창의적 역발상'이다. 역발상(逆發想)이란 이미 선점한 분야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특화된 분야를 중심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Bottom-Up 융합'을 통해 차별화된 결과물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AI 융합 전략을 '버티컬(vertical) AI'라고도 한다.지역 내에서도 이미 독창적인 원천기술을 보유한 대학 연구소와 기업들이 적지 않다. 오늘날의 AI 경쟁은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통찰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핵심이다. AI 기술의 상당 부분은 이미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있으며,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 결국 AI를 가장 잘 사용하는 인재가 경쟁에서 앞서게 된다.이러한 방향은 정부가 추진 중인 RISE(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 사업과도 일맥상통한다. RISE는 지역 대학을 산업 혁신의 거점으로 삼아, AI 융합 인재가 실재 산업 현장에서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교육 사업이다.우리 지역과 대학이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할 AI 융합 인재의 미래 분야는 다음과 같다.첫째, 인문학과 AI 융합을 선도할 인재 양성이다. 인간 중심의 인공지능 윤리, 인지과학, 디지털 인문학 등은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분야이다.둘째, 광주시가 역점을 두고 있는 모빌리티, 반도체, 바이오 분야와 AI 융합이다. 이들 산업은 AI 기술이 활발히 적용될 수 있는 유망 분야지만, 산업별 요구와 환경에 따라 적용 방식은 각각 다르다.셋째, 문화콘텐츠 분야의 AI 융합 인재 양성이다. 광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이자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창의적 콘텐츠 산업의 가능성이 풍부하다. 예술과 기술, 과거와 미래를 잇는 융합형 인재 양성은 필수이며, AI 문화산업의 확장성은 무궁무진하다.이러한 AI 인재 양성의 패러다임은 기존의 Top-Down 방식에서 실무 중심의 Bottom-Up 방식으로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생성형 AI는 인간의 언어 구조와 질문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결국 기술과 사람, 현장과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융합적 사고와 AI로 문제를 해결하는 '폴리매스(Polymath)형 도전가'가 필요한 시점이다.AI 인공지능은 '인간을 모방한 지능'이다. 이는 AI가 '컴퓨터적 사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분야와 학문을 융합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AI 융합 교육의 시작은 '국·영·수 중심'이나 '공학 중심'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창의적 역발상이 우선이다.창의성이란 '답이 하나'가 아니라 '답이 여러 개'다. 답이 여러 개일 때, 상상력과 창의력이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김경수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미디어콘텐츠·컬처테크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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