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불교의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보시'는 베풂이다.
재물을 나누고, 액난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부처의 지혜를 전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무주'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이 어렵다. 상은 기억이다. '내가 보시했다, 저 사람에게 보시했다, 이것을 보시했다'는 생각이 상이다.
나는 술을 여러 번 샀는데 그놈은 맨날 얻어먹기만 하네, 하면서 은근히 술 되사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상이다.
무주상은 술을 산 뒤에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음, 가면 간 줄도 모르는 것, 주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것이다.
보시는 채권 전표가 없는, 기본적으로 손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으므로 그저 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因)은 남는다.
"이번에 얼마 나왔어?"
"13만4천2백50원 공고되었습니다"
"다른 필요한 거 없어?"
"없습니다"
장학금을 주는 사람과 받는 학생의 문답이다.
말이 담백하고 정직하게 오고 간다.
석 달에 한 번 한약방에 찾아가면 돈을 헤아려 봉투에 넣어준다. 그리고 더 말이 없다.
등록금에 더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기숙사비 하라고 챙겨준다.
고교 입학에서 대학 졸업 때까지 내내 그랬다. 저런 문답에 문서 한 장 있을 리 없고,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돈을 주었는지 헤아렸을 리 없다.
옛 한약방 옆에서 자전거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30년이 넘도록 세를 올린 적이 없고, 코로나 때는 오히려 깎아 주었다"고 했다. 지역신문을 창간하는 일, 연극 극단을 창립하는 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일, 가정폭력 피해 여성 재활시설을 만드는 일, 그런 일들이 그냥 될 리 만무하건만, 독지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눈보라 치는 어느 저녁, 일본의 백운선사가 출타했다 절에 돌아가는 길이다. 일주문 앞에 걸인이 앉아있다. 얇은 옷에 가만두면 얼어 죽을 모양이다. 스님, 발길을 멈추고 자기 누비옷을 벗어준다. 걸인은 당연한 듯 옷을 받아 입고 말이 없다. 스님이 "이보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는가?" 하니, "줬으면 그만이지. 내가 옷을 입어주었으니 고맙다는 말은 스님이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응수가 걸작이다. 여기서 선사, 한 깨달음을 얻었고, 걸인은 문수보살이었다'는 이야기.
누비옷을 벗어주는 것이 '보시'다. 그리고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에 퍼뜩 깨달음이 '무주상'이다. 이 이야기는 버전이 여럿 있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도 약간 달리 나온다. 이 책 제목 '줬으면 그만이지'(김주완)가 걸인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무주상보시'를 이토록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어 놓았다.
"저는 고교 2학년부터 대학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문형배 당시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목이 메어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진주 시민사회가 마련한 김장하 선생 깜짝 생일잔치. 이제는 유명해진 이 이야기가 나온다. 장학금을 주는 행위는 '보시'이나, 훗날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라는 말을 만나면서 '무주상'이 된다. '줬으면 그만이지'가 언(言)에서 행(行)으로 건너가는 대목이다. 지난 4월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이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는 대목은, 그냥 우연이 아니라, 김장하가 뿌린 인(因)의 씨앗이 우리에게 연(緣)으로 회향(回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불교의 말들은 앞에 '무(無)'자가 많이 붙는다. 무소유 무욕 무심 무명 무위 무아 무주상, 그리고 무등(無等)도 그렇다. 어느 정도 높아야 일등, 이등, 하는 것이지, 까마득히 높은 것은 등을 매길 수 없는 '무등'이다. '무'자 언어들을 하나로 꿰는 최상이 '무아(無我)'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 아닌 것이 없다'는 원시 불경 '숫타니파타'의 경구.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아'를 쫙 펼쳐 보여주는 경지가 '무주상'이다. 이 '무'자 돌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훌륭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에 있다는 가르침을 김장하는 보여준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은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생일잔치에서 김장하 선생이 한 인사말, 이토록 간결하다.
1963년 한약방을 열어 2022년 닫기까지, 60년의 긴 여정을 마치고 김장하 선생,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인생은 다리이니, 건너는 가되 그 위에 집 짓지는 말라'는 어느 랍비의 말이, '무주상'으로 일관한 그의 삶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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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평] 디지털 문해력, AI 문해력 대한민국은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남다르고 의무 교육이 촘촘히 짜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종대왕께서 발명하신 '한글'의 독보적 우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는 것'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문해력'이다.OECD는 만 16~65세 성인들에 대해서 언어능력, 수리력 및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를 실시하고 있다. PIAAC의 특징은 동일 집단에 대해 10년 간격으로 조사를 반복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조사에서 25~34세였던 집단이 2022년에는 35~44세가 되는데 이 집단의 역량이 10년 사이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문해력의 경우 500점 만점에서 249점으로 OECD 평균 260점보다 11점 낮게 나타났다. 게다가 학생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성인들은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10년 사이에 20점 이상 점수가 하락하면서 수준이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국가로 분류됐다.2021년 6월, 스탠포드 대학은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되는 정보의 타당성, 불공정성을 얼마나 잘 판단하는지 학부생들의 온라인 추론 능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타당성이나 공정성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원주민이라 불리는 MZ세대,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 모인다는 명문대학의 신입생이 디지털 기술에는 익숙하지만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예절이나 디지털 정보 평가 능력, 디지털 권리와 책임감 등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은 부족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더 처참하다. 2018년 OECD 조사에 의하면 사실과 의견을 식별할 줄 아는 능력, 이를 위해 정보의 주관성과 편향성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비율에서 우리나라는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공지능에 선별적으로 제시하는 소식을 듣고, 인공지능이 권하는 길을 선택하고, 인공지능이 제어하는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선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덕목은 디지털 문해력과 AI 문해력이다. 디지털 문해력은 단순히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잘 활용하는 기능적인 능력이 아니다. 정보를 평가하고, 논쟁하며, 기존의 정보에서 문맥을 읽어내고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이 필요하다. 온라인 공간을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본 소양과 온라인 상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협력할 줄 아는 태도와 능력 또한 필요하다. 잘못된 정보와 개인의 의견, 편견으로부터 가치있는 정보를 골라내는 것도 디지털 문해력의 필수 조건이다. 현대인의 쉽게 빠지기 쉬운 4가지 인지적 편향성은 디지털 상에서는 알고리즘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사람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온 디지털 세상에 인공지능이 더욱 큰 영향력과 지배력을 가지면서 AI 문해력이 현대 시민의 필수적 소양이 되고 있다. 디지털 문해력과 마찬가지로 AI 문해력은 단순한 AI 활용 능력이 아니라, AI가 제시하는 의견에 대한 비판, 평가, 식별 능력이 포함되며 AI를 활용한 결과물의 윤리적 사용, 결과의 차별화 능력, AI를 활용한 협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를 포함한다. 학습 데이터의 편향에서 초래되는 AI의 인지적 편향 역시 AI 문해력을 갖추어야만 극복할 수 있다.인공지능 시대에 대비하여 전국민 AI 교육 확산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AI교육 교사연구회, SW선도학교 등의 사업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으며, SW 교육과정은 물론,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인공지능 수학' 과목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인공지능'을 만들거나 다루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만들'거나 '다루'기 보다는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코딩능력이나 수학 능력보다 디지털 문해력이고 나아가 AI 문해력이다. 정규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이미 교육과정을 수료한 이들에게도 디지털 문해력과 AI 문해력에 대한 재교육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교육 전문가들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실효성 있는 교육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전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하여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고민도 시급한 과제로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디지털 시대에 적응하기에도 벅차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인공지능이라는 더 큰 장벽이 나타났다. 이 장벽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는 낙원같은 일상이 펼쳐질 테지만, 이 장벽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더욱 뒤처지게 될 것이다. 디지털 디바이드를 넘어 AI 디바이드가 사람들을 갈라놓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리더는 '누구도 뒤에 남겨 놓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AI 리터러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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