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인간을 읽다

달덩이같이 노랗게 물든 그곳에 가면 '고향'이 보인다

입력 2023.08.23. 18:19 양기생 기자
[마을과 인간을 읽다]⑧고흥군 풍양면
고흥 풍양면 한동리 유자공원에서는 매년 유자 축제가 열린다. 이름표 달기, 통기타 공연, 골든벨 도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물놀이패를 따라 유자밭을 거닐며 색다른 낭만을 느낄 수도 있다. 고흥군 제공?

[마을과 인간을 읽다]⑧고흥군 풍양면

바람을 맞아야 크는 과일이 있다. 대부분 과일이 햇빛 속에서 속이 차고 익어가지만, 유자는 유독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다. 해풍이 맵차게 나무를 흔들고, 가지 몇 개를 부러뜨려야 유자는 굵어간다. 탱자처럼 푸르딩딩한 유자가 노랗게 익기까지 해풍과 천둥 몇 개가 들어 있다.

유자가 시큼한 것은 바다를 홀로 사랑했다가 외면당한 지독한 질투심이거나 매서운 해풍에 가시가 안으로 박혀 스스로 속살을 수없이 찔러서인지 모른다. 유자는 그래서 감히 아무도 붙일 수 없는 접미사 자(子)를 쓰는 과일이자 제사상에 꼭 올라야 하고, 웬만한 부자 아니고서는 누구나 감히 넘볼 수 없는 열매인지 모른다.

그래서 유자는 계절로는 겨울, 사람으로는 모진 세월을 견뎌낸 환갑은 훌쩍 넘긴 이에게 맞춤인 과일이다. 차를 끓여서 그 향기가 입안, 몸 안으로 퍼지는 인생의 맛을 아는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

고흥 가는 사람은 주로 녹동항을 거쳐 소록도와 거금도로 가거나 적금도 낭도 쪽으로 간다. 물론 외나로도로 참치 회를 맛보고 우주 발사 장면을 보러 가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발자국처럼 찍혀있는 발포나 여도진 사도진을 볼 수 있고,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팔영산이나 마복산을 찾지만 풍양면은 이래저래 그냥 비껴가기 일쑤다.

풍양은 풍양면 사무소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딸깍 고개 하나를 넘으면 한동리 유자(柚子) 공원이다. 공원은 온통 유자밭과 사잇길뿐이다. 언덕에서 바라보니 유자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고 군데군데 마을이 있다. 산 뒤쪽 녹동 가는 고속도로 아래로 실개천이 송내다.

고흥 풍양면 송내

이곳에서 매년 고흥 유자 축제가 열린다. 가을이면 '나의 유자나무'에 이름표 달기, 사물놀이·통기타 공연 관람, 고흥의 역사문화를 알아볼 수 있는 고흥 골든벨 도전, 나의 유자나무와 즉석 사진 찍기, 유자 미스트 만들기 체험 등 '유자밭 팜파티'가 다채롭게 열린다. 사물놀이패를 따라 유자밭을 거니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풍양면 유자 공원

유자 공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문득 얼마 전 읽은 소설이 떠올랐다. 유난히 모과를 노란 등불이나 달에 비유하여 서정성을 자극한 작가, 나무에 감정이입을 잘하는 작가, 장편소설 '포토타임'과 단편집 '직박구리가 사는 은행나무'를 출간한 소설가 이중섭이다.

이중섭 소설가는 풍양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바다에서 꼬막도 캐고 고기도 잡고, 밭에서 유자와 감을 관리하며 자란 전형적인 베이비붐 막내 세대다. 그의 이촌향도는 태생적이자 운명이었다. 광주로 순천으로 서울로 삶의 터전을 찾아 움직인 것은 운명이었고 송내를 벗어나 넓은 바다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정해진 순명(順命)인 셈이다. 그래서 풍양 바다는 비록 떠나 살지만, 언젠가 회귀해야 할 모천이자 뿌리다. 그의 소설 곳곳에는 고향 한동리가 배경과 소재를 넘어 주제에 이르기까지 한다.

포토타임은 나무 아래에서 어른인 나를 기다리는 꼬맹이인 나 자신과 너 그리고 함께 송냇가 둑길을 걸었던 깨복쟁이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 포토타임, 중에서

이중섭 작가의 소설

포토타임 서문에서 작가는 이 소설이 자기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과 유년 시절 고향 이야기임을 명시하고 있다.

제방 너머로 멀리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고향의 송내가 펼쳐진다. 은어가 팔딱이는 봄이나 보리 숭어가 올라올 오월을 지나 참게가 부화하려 바다를 향하는 늦가을에도 이 갈맷빛 둑이 떠오르곤 한다. 이 기수역에서 회귀성 어류는 체액의 농도를 조절한다. 바닷고기는 바닷물에 맞게, 민물고기는 민물에 맞게 자기 몸을 순응한다. 사람이 죽어 회귀 어류처럼 탈바꿈한다면 진규가 저승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망각의 강이 혹 송내지 않을까. -숨은 벽, 중에서

숨은 벽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나 이청준의 '축제'처럼 친구 장례를 배경으로 고향인 풍양 친구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숨은 벽은 슥슥슥 네모나게 비석 등을 짊어지고 갈대와 개펄을 오가며 살아가는 참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면서 작가는 친구 진규를 통해 누구나 종국에 마지막은 고향 기수역 송내에서 껍질을 벗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수구초심 반문하고 있다.

겨울밤이 깊을수록 실비집은 나룻배처럼 출렁인다. 형준은 나룻배에서 꿈을 꾼다. 긴 강을 거슬러 내를 지나고 작은 개울에 닿는다. 바닷물은 어느새 실비집 느티나무 아래에 출렁인다. -실비집, 중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이 모인 곳이 서울이고 실비집 역시 고향 어느 선술집을 옮겨놓은 곳이나 진배없는 곳이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처럼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 주인공들은 각자 삶을 모색하지만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다.

흔히 소설을 허구라고 해도 모두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 작가의 경험과 체험이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는 게 작품이다. 그만큼 작가의 고향은 작품과 무관할 수 없다.

이중섭 작가 소설의 뿌리는 풍양이고 근원은 송내다. 그에게 직박구리, 토끼, 참게, 꼬막 등은 바로 고향의 자연을 의미한다. 그는 또 나무의 작가라고 할 정도로 모과나무 말채나무 감나무 등 나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동리 마을과 유자밭

이중섭이 자란 마을은 주변의 95%는 유자이고 그 역시 유자밭과 감나무밭을 경작하고 있다. 매해 유자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그가 유자에 대해 모를 리 없다. 그는 왜 유자를 외면하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그의 은밀한 아킬레스건인지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노출한 소설가다. 아데니움에서 딸이나 검은등뻐꾸기에서 허청댁 이야기는 허구라기보다 실화에 가깝다. 그런 그가 유자 이야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일까? 고향하면 송내나 친구보다 부모님을 먼저 떠올랐을 것이고 다음에 유자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을 것이다. 유자와 부모님, 부모님과 유자.

어머니와 함께했던 유년 시절,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시절이 자꾸만 그립다. 그리운 것이 전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지난날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유년 시절을 못내 그리워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포토타임, 중에서

작가는 유자의 유자도 꺼내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유자 이야기를 쓰려면 부모님이 아른거릴 것이고 결국 그는 또 눈물로 어디쯤 서성거렸어야 할지 모른다. 작가는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있던 아버지가 작가의 책 포토타임을 받고 눈을 끔벅이며 작가를 물끄러미 바라본 모습을 '직박구리가 사는 은행나무'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중섭 소설가와 유자

이중섭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에게 '고향과 효'는 늘 삶의 반쪽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 이들 이후엔 고향도 효도 없어질지 모른다.

유자는 육적회귤 고사로 인해 홍시처럼 효의 상징물이다. 언젠가는 고향 유자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낼 것으로 믿는다. 제아무리 다루기 힘들어도 그는 해낼 것이다. 그만큼 그의 흉중에 남은 빚과 사랑은 부모에 대한 것이고 그가 유자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것은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사랑으로 익어간다는 의미 일 게다. 고흥 유자는 지금 가을 햇살에 막 노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유자축제. 고흥군 제공?

그가 막 유자 이야기를 풀어 놓을 즈음, 풍양 하늘에는 유자같이 커다란 둥근 달이 떠오르고, 들판은 온통 유자 빛깔로 노랗게 물들어갈 것이다.

고흥 유자 축제에 가서 몇 그루 아기 유자나무를 받아서 꼭 집 뒤란 어디에 심고 그가 풀어내는 유자 이야기도 들춰봐야겠다.?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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