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호남과 인연 발포 만호서 시작
전라좌수사 부임후 바다 등 지역 읽혀
군사·군량·군수 물자 수급에 든든한 버팀목
일본과 7년전쟁 조선 승리 이끈 동력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함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전선 700여 척에 15만8천700명의 군사를 앞세워 부산으로 밀고 들어왔다. 적과 교전한 부산진첨사 정발은 부산성 함락과 함께 순절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과 영광출신 김사모 등 대부분 장수들이 전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국가의 존립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이순신 장군은 호남사람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올해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81주년이다. 이순신 장군을 돌이켜보면 전남·광주와 큰 인연이 있다. 당시 조정에서 파악한 조선 수군은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의 수군 5천명, 우수사 이억기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 1만 명을 총 2만 5천명 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자신의 서간첩(국보 76호, 1593년 7월 16일자)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보냈다.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심경을 피력한 것이다. 호남이 ‘약무호남 시무국가’ 중심이라 주장한 것은, 병참물자의 지원이 호남인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승전고를 올린 명량대첩 역시 호남 사람들의 성원으로 이루어졌다. 호남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자 “어버이”라고 부르며 ‘이야(李爺)’를 연호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절하자 호남 여인들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곡했다. 이순신 장군이 순절한 지 3년 되던 해인 1601년(선조 34), 전국에서 처음으로 여수사람들은 충민사를 건립, 이순신 장군을 추모했다. 1603년(선조 36)에는 ‘타루비’를 세워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 장군의 호남과 인연은 1580년(선조 13) 고흥 발포만호로 1년 8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시작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2년 전으로, 이순신은 이때 바다를 알게된다. 1589년(선조 22) 12월에는 정읍과 태인에서 현감직을 수행하면서 호남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1591년(선조 24) 2월 진도군수에서 가리포 첨사를 거쳐, 선조의 불차탁용에 의해 전라좌수사가 되면서 호남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우선적으로 물길을 잘 아는 호남지역민과 연해 출신의 장수와 부하들을 기용하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광양현감 어영담을 수로향도로 임명도 이러한 그의 준비된 인재 등용이었다.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인사 중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해전을 참전하여 죽거나 공을 세운 인물로 145명이 기록되어 있다. 호남은 임란 전장에서 군사, 군량, 군수물자 등의 수급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다. 양곡 생산의 주산지였기에 가능했다. 1596년(선조 29) 이순신 장군은 약 두 달 동안 호남 연해 전 지역을 돌면서 중요한 거점을 확인하며 민정시찰에 나섰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이순신은 윤8월 10일부터 두 달 동안 호남 45개 지역 30곳의 관청을 점검하고, 10월 10일 한산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이순신 장군과 지역민들은 향토방위의 결집력을 형성했다. 45일간의 그의 민정시찰 일정을 살펴보면, 8월 14일 바쁘게 노를 저어 새벽에 광양 두치에 도착, 소촌찰방에게 역마를 인계하여 광양 관청을 찾았다. 장군은 전선을 만드는 것과 수리하는 부역을 면제해주고 백성과 군사를 위로했다. 광양현감 수로향도 어영담은 이순신의 최고 조력자였다. 어영담이 쌓은 마로산성이 전해지고 있다. 광양선소 유적지는 어영담이 이끌고 이순신 장군 지원에 나섰던 광양 1호선, 광양 2호선, 광양 3호선, 광양 4호선 등이 건조된 곳이다. 광양 김대례와 광양민들은 이순신을 후원하며 진월 선소를 사수했다. 어영담은 이순신 장군 명령을 받들어 전염병으로 사망한 전사자를 수습 중 순국한다. 그의 시신은 보성에 안장됐다. 광양출신 박대복, 박성춘, 김두남 등이 이순신 장군과 이름을 날렸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광양 인물로 박대복, 허수익, 허수겸, 성윤문, 성기수, 강희보, 임우화, 성윤문, 김천록, 김연우, 박성춘, 박이량, 황대업 등이 전공을 세웠다. 봉강 출신 형제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은 쌍의사에서 그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순신은 윤8월 15일 길을 떠나 인접한 순천부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순천부 서면에 있는 정사준의 집으로 갔다. 다음날 하루 더 정사준의 집에 머물면서 내륙 이동 경로를 구상했다. 정사준은 조총을 만든 군관으로 사후 순천 옥계서원에 배향됐다. 순천에는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았던 한산정이 있다. 해룡면의 충무사에는 이순신, 정운, 송희립 등이 배향되어 있다. 순천왜성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1만4천여명의 병력에 맞서 이순신 장군은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순천에서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 참가한 인물은 박대복, 박성춘, 이응춘, 김두검, 김대춘, 정사준, 이기준, 이기남, 이기철, 이종호, 김대인, 정대수, 김모, 정훤, 정철, 정춘, 한위 등이다. 특히 순천부사 우치적과 권준 등도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

순천부 일정을 마친 이순신은 윤8월 17일 저녁 나절에 낙안읍성에 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은 낙안군에서 이호문과 이지남 등을 불러 수군의 전함 건조 문제를 논의했다. 낙안 객사에서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이 순신이 심었다는 객사 뒤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낙안군수 신호, 낙안 수군, 이필종, 방덕룡, 오경남, 선정립 등이 전공을 세웠다. 특히 해상의병 전방삭, 이신수 등의 전공도 컸다.
다음날 이순신 장군은 고흥 동강면 양강역에서 점심을 먹고, 남양면 대곡리 산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먼 바다 전투가 예상되는 지점을 살피고, 흥양현으로 향했다. 흥양현 향소청에서 흥양현감과 밤새도록 작전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윤8월19일에는 고흥군 도덕리 도양 둔전에 들려 군량 수급계획 등을 살피고, 도양면 녹도에서 유진했다. 고흥에서는 배흥립, 진무성, 정걸, 송희립, 신여량, 류충신, 류충여, 김득광, 정걸, 송상보 등의 활동이 이순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고흥에는 당시 관련 유적으로 배를 만들고 거북선을 제작한 발포선소, 고흥읍성, 발포만호성, 충무사, 사도진성, 여도진성지, 녹도진성, 남양산성, 만리성, 쌍충사, 고흥아문, 운곡사, 서동사, 무열사, 안동사, 송씨쌍충일렬각, 신여량장군정려, 신군안의 이순신 친필 첩지인 차첩문서 등이 남아 있다. 송덕일의 ‘서호충열록’에는 이순신의 활동 일지와 전황 등이 전한다. 호남절의록에 이순신 장군을 도운 인물로 송희립, 송정립, 송흥운, 박홍세, 최천보, 김덕방, 신군안, 김세호, 김붕만, 김만동, 박은춘, 신인수, 송덕일, 정운희, 진무성, 송득운, 이영명, 송계현, 송계창, 김언량, 김언공, 노윤발, 김기남, 송유선, 이응홍, 이계남, 서수장, 박인어, 정걸, 송지, 송선, 송영 등을 수록했다.

윤8월 20일 고흥 도양면 녹도에서 배를 띄워 보성 회천면 명교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윤8월 11일시작된 10일간 본영, 광양현, 순천부, 낙안군, 흥양현, 보성군 등 전라 좌수영 관할 호남 남동부지역을 살펴봤다. 이어 장군은 윤8월 20일 전라우수영 관할 서남부 연해지역 시찰에 나섰다. 장흥, 강진, 완도, 해남을 거쳐 다시 북상해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으로 갔다. 종횡무진 활동이었다.

1596년 윤8월 20일 장흥에서는 동헌에서 김응남을 만났다. 다음날 정경달과 하루 동안 군사 일을 논했다. 이순신과 관련 유적으로 장흥에는 회령진성, 반계사 등이 전하고 있다.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는 김응원, 김응생, 문기방, 신응현, 위대기, 위대택, 위순정, 위덕화, 변홍달, 김윤명 등이다. 호남절의록에 기록된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는 노홍, 마하수, 김몽성, 선세신, 신용호, 신용준, 정경달, 임영립, 김성원, 마성룡, 마위룡, 박은복, 백진남, 정명설, 김안방, 문영개, 변홍원, 김택남, 임영개, 백선명, 정운희 등이 나타난다.

윤8월 22일 밤에 강진 병영면 전라 병영에 이른다. 강진 병영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조선시대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이곳에서 전라병사 원균과 밤이 깊도록 군사문제를 논의했다. 이순신은 윤8월 24일 강진 병영을 재차 방문하고 전라병사 원균과 서로 의견을 개진했다. 강진에는 당시금강사, 강진 병영성, 마도진만호성지, 수인산성 등이 전한다. 임진왜란 중 크게 활동한 인물은 염걸, 황대중, 김응추, 김백추, 김대복, 윤신, 오신남, 김덕란, 김근 등이 있다. 호남절의록에서는 박인수, 김응추, 김억추, 김덕복, 김인복, 송홍득, 조언신 등은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 소개된다.
윤8월 24일 이순신은 부찰사 한효순과 함께 완도 완도읍 군내리 가리포진에서 우후 이정충을 만나 남쪽 남망봉 망대산으로 올라갔다. 완도에는 가리포진과 묘당도, 이순신 장군의 무덤인 월송대, 백사장, 사정터, 어란정, 해남도, 관왕묘 등에서는 이순신의 숨결이 살아있다. 충무사에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영남의 호국 얼을 기리고 있다.

윤8월 25일 해남현으로 향하는 길에 김경록을 만나고 다음 날 해남현청에서 일찍 길을 떠나 문내면 우수영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우수영 태평정에서 유진하며, 우후 이정충과 함께 군사 문제를 놓고 이야기했다. 윤8월 29일 해남 문내면 우수영을 출발하여 아침에 해남 황산면 남리리 남여역에 이르렀다. 낮에는 해남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본영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군관 소국진을 보냈다. 전라우수영지에는 세계 해전사에 드라마틱한 승리를 끌어낸 것을 기념하는 명랑대첩비가 있다. 우수영성지 일대에는 망해루(望海樓)를 비롯한 12개소의 터지와 서상리에 방죽샘이 있다. 강강술래터지, 전라우수영지, 어란포, 이진항 등이 전한다. 임진왜란 중 해남 출신으로 이순신과 함께 전투를 치루거나 지원한 인물로 정운, 이억기, 이유길, 유형, 임회진, 임준, 임천갑, 김정윤, 오극신, 오정달, 이숙형, 김안우, 김정옥, 윤검, 김진룡, 김정윤, 김종인, 박팽세 등이 이름을 날렸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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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문성-대중성 바탕 '미술 한류' 진원지 만들기 앞장"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전문성과 대중성이라는 양 날개를 균형있게 발전시켜 광주비엔날레가 세계에서 '미술한류' 열풍의 진원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윤범모 신임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는 2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대중문화가 K-콘텐츠로 한류열풍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순수예술도 동행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면에서 미술 장르가 국제경쟁력 1순위라고 생각하며 광주가 충분히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무대예술이나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문학과 달리 미술은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 그대로 국제무대에 직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윤 대표이사는 이에 앞서 지난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립 과정에 참여한 경험을 돌아봤다. 그는 가천대 회화과 교수로 재임할 당시 비엔날레 창립 집행위원과 특별전 큐레이터로 참여한 바 있다."처음 창립할 때 일부 지역 작가들의 반대가 있었고 비엔날레라는 명칭을 두고도 우려가 적지 않았음에도 결국은 추진됐다"고 밝힌 그는 "나중에 지역의 카페나 식당에 '비엔날레'를 활용한 간판들이 생기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그는 이어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한 지 30년이 흐른 지금은 국제무대에서 내로라 할만큼 주목받는 국제적 행사가 됐다"면서 "그동안은 국제무대 진입에 비중을 뒀다면 이제는 광주만이 할 수 있는 비엔날레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윤 대표이사는 이를 위한 전제로 '광주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했다. 누구나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엔날레가 아니라 광주만이 가능한 차별화된 비엔날레를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그는 "광주비엔날레가 그동안 국제현대미술 흐름을 조망한다는 취지를 고려하다 보니 전문가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이제는 대중과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민들과 호흡하는 비엔날레를 치르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윤 대표이사는 후원회 조직을 통한 '비엔날레 가족 확대'에 대한 의욕도 드러냈다.광주비엔날레는 국내에서 치러지는 대부분의 행사와 마찬가지로 예산과 인력부족의 어려움이 있는 만큼 전국 규모의 후원회를 조직한다면 '물심양면'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윤 대표이사는 "후원회를 통해 '광주비엔날레 가족'을 많이 확대한다면 예산 지원과 함께 문화 공유와 확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지역 작가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방안도 제시했다.윤 대표이사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무리 국제행사라지만 결국은 광주가 운영하는 것이니 만큼 지역과 지역 예술인에 기여하는 행사가 돼야 할 것"이라며 "지역 작가들의 창작열을 북돋울 수 있는 매개자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그는 "지역 작가들을 만나보니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는 데도 발표할 기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작품이 팔리지도 않는다'며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는 단순히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내가 관여하는 국제 행사에 광주 작가를 많이 참가시키고 중앙 무대는 물론 해외 무대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광주비엔날레와 디자인비엔날레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 전시장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비엔날레 30년 역사를 정리해서 누구나 현장에서 쉽게 자료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기획전이나 순회전, 소장품전을 갖는 방안을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다.윤 대표이사는 "외국인 몇 분이 광주비엔날레 행사장을 찾았다가 전시가 열리지 않는 바람에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비엔날레 전시장을 행사 기간이 아닌 때에도 다양하게 활용할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강조했다.끝으로 윤 대표이사는 코앞으로 다가온 2025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개막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그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를 무사히 치르는 일이 최우선 과제"라며 "전시 행사 전반은 총감독이 책임을 지고 진행하고 있는 만큼 이를 잘 뒷받침해서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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