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톺아보기
94년 창설…80년 아픔 예술로
다양한 실험·파격 메시지 '주목'
05년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출범
20주년 특별전서는 검열 논란도
교류 확장 위한 파빌리온전 도입

2024년 광주비엔날레는 창설 30주년을 맞이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광주비엔날레는 어떻게 흘러왔고 또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광주비엔날레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의미 있는 지점을 재조명하고, 보다 세계적 메가 미술 이벤트가 되기 위한 과제는 무엇인지를 점검한다.

◆가시밭길 연속인 시작부터 2010년까지
1994년 11월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됐다. 80년 5월 아픔을 예술로 밝히고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야심차게 첫 발을 뗀 광주비엔날레는 당시 정부의 미온적 반응에 좌초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다각도의 노력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첫 행사를 준비, 1995년 치렀다. 1997년 2회 행사 개최 이후 5·18민주화운동 20주년과 새천년 등의 의미를 담기 위해 3회 행사를 한 해 늦춰 2000년에 치른 후로는 격년으로 짝수해에 치러졌다.

2회까지는 광주시립미술관이 광주비엔날레재단의 사무처를 총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다가 3회부터 시립미술관과 재단이 분리돼 행사를 치렀다. 특수사안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국제예술행사를 치르기에는 관의 운영체제 아래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점은 물론 국제예술행사에 필요한 전문성 등의 문제로 인한 '민영화 파동'이 일어나면서다. 이 과정에서 총감독이 해임되고 끝까지 목소리를 내던 재단 직원 6인은 재계약에서 배제되며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미술계가 시끌시끌해지기도 했다.

광주비엔날레는 첫 회부터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선보이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같은 주목을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광주시는 광주비엔날레 재단에 주관을 위탁, 200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를 시작했다. 5회까지 무사히 디자인비엔날레를 재단이 치렀으나 이후로 매년 국제 행사를 치르는 데 있어 업무가 과중해 두 행사에 대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음은 물론, 국제예술행사를 맡은 기관으로서 경제 유발 효과까지 챙기기란 쉽지 않아 6회부터는 광주디자인진흥원으로 주관처를 옮겼다.
3회부터 총감독제로 운영된 광주비엔날레는 7회 감독으로 외국인과 내국인을 공동감독에 2007년 선정했으나 내국인 감독이었던 신정아의 학력·이력 위조 사태가 벌어지며 재단은 감독 선정 과정의 투명성을 의심 받기도 했다.
광주시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국제아트페어를 도입하기 위해 알맞은 시기를 살피다 2010년 국제 아트페어 개최를 결정했다. 앞서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시는 국제적 예술행사의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광주비엔날레 재단으로 아트페어 첫 회 개최를 맡겼고, 재단은 8회 전시와 함께 아트페어 인큐베이팅을 떠안기도 했다.

◆예상 외 난관 헤쳐나간 2011년~현재
2011년에는 4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이던 승효상 건축가의 제안으로 광주폴리가 태동했다. 승 감독의 제안은 1회성 전시에서 나아가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도시 곳곳에 설치해 하나의 자산으로 만들자는 특별프로젝트였다. 이를 시작으로 2차부터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와는 별도의 광주폴리 사업이 재단에서 추진됐고 최근 5차 폴리까지 마무리됐다.
2014년 10회 전시를 앞두고는 예술 검열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 전시될 홍성담 작가의 '세월오월' 사건이 그것이다. 10회 전시가 열리는 2014년 봄에는 세월호 사건이 벌어져 온 국민의 공분과 안타까움을 산 바 있는데 홍 작가가 이 아이들의 희생에는 당시 박근혜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은유, 풍자한 것이 '세월 오월'이다. 작품 속 박 전 대통령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허수아비로 묘사됐다. 이에 특별전 담당자와 광주시가 국비 지원에 제한을 받을까 염려해 해당 부분에 대한 수정을 요구했고 홍 작가는 고민 끝에 박 전 대통령 얼굴을 닭 대가리로 바꿨으나 시는 결국 전시 불허를 통보했다. 이후 작가가 자진철회 의사를 밝혀 이 작품이 빠진 채로 특별전이 진행됐지만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 논란이 불거지며 전국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2018년에는 해외 예술기관과의 교류와 협력 관계를 넓히기 위해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도입되기도 했다. 프랑스 팔레 드 도쿄와 핀란드 헬싱키 국제아티스트프로그램이 초기 파빌리온에 참여했으며 이후 외연을 확장해 지역 내 기관과의 교류로까지 확대됐다.

2000년 이후로 스무해 넘도록 '짝수해 개최'는 공식처럼 여겨졌으나 한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19년 말 급성호흡기전염병인 코로나19가 발생, 2020년 초부터 유행하면서 전세계가 국가 간의 이동은 물론 지역 간의 이동 또한 통제하면서다. 이에 2020년 예정됐던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한 해 미뤄 2021년에 치러졌다. 제14회 행사 또한 2년 후인 2023년에 열렸으나 제15회 행사는 '창설 30주년'의 의미 등을 고려해 다시 짝수해인 올해 치러졌다. 연달아 행사를 치르기 위해 14회를 준비하면서 15회 행사까지 준비하는 강행군이 펼쳐지기도 했다.
올

해에도 또다른 이슈가 제기됐다. 지난해 연말께 발표한 새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국제설계공모 당선작을 둘러싼 논란이다. 전시관 노후화로 인해 현 전시관의 주차장 부지에 새로운 전시관을 만들어 2027년께까지 준공하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국제설계공모였으나 올해 1월, 지역 원로 작가들과 중견 작가들이 건축물의 참신성과 실험성이 부족하다며 세계적 건축가에 의한 설계가 재진행돼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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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호남시무국가, 나라 위기마다 앞장선 남도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함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전선 700여 척에 15만8천700명의 군사를 앞세워 부산으로 밀고 들어왔다. 적과 교전한 부산진첨사 정발은 부산성 함락과 함께 순절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과 영광출신 김사모 등 대부분 장수들이 전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비극적인 전쟁으로 국가의 존립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이순신 장군은 호남사람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올해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 탄신 481주년이다. 이순신 장군을 돌이켜보면 전남·광주와 큰 인연이 있다. 당시 조정에서 파악한 조선 수군은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의 수군 5천명, 우수사 이억기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 1만 명을 총 2만 5천명 이었다.이순신 장군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자신의 서간첩(국보 76호, 1593년 7월 16일자)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글을 보냈다. 즉,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심경을 피력한 것이다. 호남이 ‘약무호남 시무국가’ 중심이라 주장한 것은, 병참물자의 지원이 호남인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승전고를 올린 명량대첩 역시 호남 사람들의 성원으로 이루어졌다. 호남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자 “어버이”라고 부르며 ‘이야(李爺)’를 연호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절하자 호남 여인들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곡했다. 이순신 장군이 순절한 지 3년 되던 해인 1601년(선조 34), 전국에서 처음으로 여수사람들은 충민사를 건립, 이순신 장군을 추모했다. 1603년(선조 36)에는 ‘타루비’를 세워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이순신 장군의 호남과 인연은 1580년(선조 13) 고흥 발포만호로 1년 8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시작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2년 전으로, 이순신은 이때 바다를 알게된다. 1589년(선조 22) 12월에는 정읍과 태인에서 현감직을 수행하면서 호남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1591년(선조 24) 2월 진도군수에서 가리포 첨사를 거쳐, 선조의 불차탁용에 의해 전라좌수사가 되면서 호남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순신 장군은 우선적으로 물길을 잘 아는 호남지역민과 연해 출신의 장수와 부하들을 기용하고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광양현감 어영담을 수로향도로 임명도 이러한 그의 준비된 인재 등용이었다.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인사 중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해전을 참전하여 죽거나 공을 세운 인물로 145명이 기록되어 있다. 호남은 임란 전장에서 군사, 군량, 군수물자 등의 수급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다. 양곡 생산의 주산지였기에 가능했다. 1596년(선조 29) 이순신 장군은 약 두 달 동안 호남 연해 전 지역을 돌면서 중요한 거점을 확인하며 민정시찰에 나섰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이순신은 윤8월 10일부터 두 달 동안 호남 45개 지역 30곳의 관청을 점검하고, 10월 10일 한산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이순신 장군과 지역민들은 향토방위의 결집력을 형성했다. 45일간의 그의 민정시찰 일정을 살펴보면, 8월 14일 바쁘게 노를 저어 새벽에 광양 두치에 도착, 소촌찰방에게 역마를 인계하여 광양 관청을 찾았다. 장군은 전선을 만드는 것과 수리하는 부역을 면제해주고 백성과 군사를 위로했다. 광양현감 수로향도 어영담은 이순신의 최고 조력자였다. 어영담이 쌓은 마로산성이 전해지고 있다. 광양선소 유적지는 어영담이 이끌고 이순신 장군 지원에 나섰던 광양 1호선, 광양 2호선, 광양 3호선, 광양 4호선 등이 건조된 곳이다. 광양 김대례와 광양민들은 이순신을 후원하며 진월 선소를 사수했다. 어영담은 이순신 장군 명령을 받들어 전염병으로 사망한 전사자를 수습 중 순국한다. 그의 시신은 보성에 안장됐다. 광양출신 박대복, 박성춘, 김두남 등이 이순신 장군과 이름을 날렸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광양 인물로 박대복, 허수익, 허수겸, 성윤문, 성기수, 강희보, 임우화, 성윤문, 김천록, 김연우, 박성춘, 박이량, 황대업 등이 전공을 세웠다. 봉강 출신 형제 의병장 강희보, 강희열은 쌍의사에서 그 충절을 기리고 있다.이순신은 윤8월 15일 길을 떠나 인접한 순천부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순천부 서면에 있는 정사준의 집으로 갔다. 다음날 하루 더 정사준의 집에 머물면서 내륙 이동 경로를 구상했다. 정사준은 조총을 만든 군관으로 사후 순천 옥계서원에 배향됐다. 순천에는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았던 한산정이 있다. 해룡면의 충무사에는 이순신, 정운, 송희립 등이 배향되어 있다. 순천왜성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1만4천여명의 병력에 맞서 이순신 장군은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순천에서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 참가한 인물은 박대복, 박성춘, 이응춘, 김두검, 김대춘, 정사준, 이기준, 이기남, 이기철, 이종호, 김대인, 정대수, 김모, 정훤, 정철, 정춘, 한위 등이다. 특히 순천부사 우치적과 권준 등도 이순신 장군을 도왔다.순천부 일정을 마친 이순신은 윤8월 17일 저녁 나절에 낙안읍성에 들어갔다. 이순신 장군은 낙안군에서 이호문과 이지남 등을 불러 수군의 전함 건조 문제를 논의했다. 낙안 객사에서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이 순신이 심었다는 객사 뒤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낙안군수 신호, 낙안 수군, 이필종, 방덕룡, 오경남, 선정립 등이 전공을 세웠다. 특히 해상의병 전방삭, 이신수 등의 전공도 컸다.다음날 이순신 장군은 고흥 동강면 양강역에서 점심을 먹고, 남양면 대곡리 산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먼 바다 전투가 예상되는 지점을 살피고, 흥양현으로 향했다. 흥양현 향소청에서 흥양현감과 밤새도록 작전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윤8월19일에는 고흥군 도덕리 도양 둔전에 들려 군량 수급계획 등을 살피고, 도양면 녹도에서 유진했다. 고흥에서는 배흥립, 진무성, 정걸, 송희립, 신여량, 류충신, 류충여, 김득광, 정걸, 송상보 등의 활동이 이순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고흥에는 당시 관련 유적으로 배를 만들고 거북선을 제작한 발포선소, 고흥읍성, 발포만호성, 충무사, 사도진성, 여도진성지, 녹도진성, 남양산성, 만리성, 쌍충사, 고흥아문, 운곡사, 서동사, 무열사, 안동사, 송씨쌍충일렬각, 신여량장군정려, 신군안의 이순신 친필 첩지인 차첩문서 등이 남아 있다. 송덕일의 ‘서호충열록’에는 이순신의 활동 일지와 전황 등이 전한다. 호남절의록에 이순신 장군을 도운 인물로 송희립, 송정립, 송흥운, 박홍세, 최천보, 김덕방, 신군안, 김세호, 김붕만, 김만동, 박은춘, 신인수, 송덕일, 정운희, 진무성, 송득운, 이영명, 송계현, 송계창, 김언량, 김언공, 노윤발, 김기남, 송유선, 이응홍, 이계남, 서수장, 박인어, 정걸, 송지, 송선, 송영 등을 수록했다.윤8월 20일 고흥 도양면 녹도에서 배를 띄워 보성 회천면 명교로 향했다. 이순신 장군은 윤8월 11일시작된 10일간 본영, 광양현, 순천부, 낙안군, 흥양현, 보성군 등 전라 좌수영 관할 호남 남동부지역을 살펴봤다. 이어 장군은 윤8월 20일 전라우수영 관할 서남부 연해지역 시찰에 나섰다. 장흥, 강진, 완도, 해남을 거쳐 다시 북상해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으로 갔다. 종횡무진 활동이었다.1596년 윤8월 20일 장흥에서는 동헌에서 김응남을 만났다. 다음날 정경달과 하루 동안 군사 일을 논했다. 이순신과 관련 유적으로 장흥에는 회령진성, 반계사 등이 전하고 있다.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는 김응원, 김응생, 문기방, 신응현, 위대기, 위대택, 위순정, 위덕화, 변홍달, 김윤명 등이다. 호남절의록에 기록된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는 노홍, 마하수, 김몽성, 선세신, 신용호, 신용준, 정경달, 임영립, 김성원, 마성룡, 마위룡, 박은복, 백진남, 정명설, 김안방, 문영개, 변홍원, 김택남, 임영개, 백선명, 정운희 등이 나타난다.윤8월 22일 밤에 강진 병영면 전라 병영에 이른다. 강진 병영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조선시대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이곳에서 전라병사 원균과 밤이 깊도록 군사문제를 논의했다. 이순신은 윤8월 24일 강진 병영을 재차 방문하고 전라병사 원균과 서로 의견을 개진했다. 강진에는 당시금강사, 강진 병영성, 마도진만호성지, 수인산성 등이 전한다. 임진왜란 중 크게 활동한 인물은 염걸, 황대중, 김응추, 김백추, 김대복, 윤신, 오신남, 김덕란, 김근 등이 있다. 호남절의록에서는 박인수, 김응추, 김억추, 김덕복, 김인복, 송홍득, 조언신 등은 이순신을 도운 인물로 소개된다.윤8월 24일 이순신은 부찰사 한효순과 함께 완도 완도읍 군내리 가리포진에서 우후 이정충을 만나 남쪽 남망봉 망대산으로 올라갔다. 완도에는 가리포진과 묘당도, 이순신 장군의 무덤인 월송대, 백사장, 사정터, 어란정, 해남도, 관왕묘 등에서는 이순신의 숨결이 살아있다. 충무사에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이영남의 호국 얼을 기리고 있다.윤8월 25일 해남현으로 향하는 길에 김경록을 만나고 다음 날 해남현청에서 일찍 길을 떠나 문내면 우수영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우수영 태평정에서 유진하며, 우후 이정충과 함께 군사 문제를 놓고 이야기했다. 윤8월 29일 해남 문내면 우수영을 출발하여 아침에 해남 황산면 남리리 남여역에 이르렀다. 낮에는 해남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본영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군관 소국진을 보냈다. 전라우수영지에는 세계 해전사에 드라마틱한 승리를 끌어낸 것을 기념하는 명랑대첩비가 있다. 우수영성지 일대에는 망해루(望海樓)를 비롯한 12개소의 터지와 서상리에 방죽샘이 있다. 강강술래터지, 전라우수영지, 어란포, 이진항 등이 전한다. 임진왜란 중 해남 출신으로 이순신과 함께 전투를 치루거나 지원한 인물로 정운, 이억기, 이유길, 유형, 임회진, 임준, 임천갑, 김정윤, 오극신, 오정달, 이숙형, 김안우, 김정옥, 윤검, 김진룡, 김정윤, 김종인, 박팽세 등이 이름을 날렸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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