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이 공개된 이후 교권과 학교 현장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창설된 가상의 조직 '교권보호국'이 학교 현장에 개입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교권 침해, 학교폭력, 학부모 민원 등 교육 현장에서 제기돼 온 문제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며, 교권보호국 소속 인물들이 각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교권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교권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이 잇따랐지만, 교사의 교육활동 보장과 학생의 권리, 학부모의 참여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통쾌하게 문제를 해결하지만, 현실의 학교는 훨씬 복잡하다. MZ세대 기자들은 '참교육'을 계기로 현 교권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 교권이 높다 VS 낮다
▲쌍촌동 비룡(이하 비) = 교권은 법과 제도에 의해 정해진 재량 영역의 권력이다. 현재 재량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부모와 학생의 눈치는 물론이거니와 대중의 판단까지 생각해야 하는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재량으로 업무를 처리했다간 단순한 눈총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추락하는 위상 속에서 교권을 재정립해야 하는 시기다.
▲문흥동 물주먹(이하 물) = 최근 뉴스에 보도되는 학부모의 과도한 악성 민원과 학생들의 도가 지나친 교실 내 행동들을 보면 현재 한국의 교권은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드라마 '참교육'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극 중 에피소드들의 극단적인 상황들이 마냥 지어낸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장 교사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권위 상실은 심각한 수준이다. 교사들이 제대로 된 지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권리가 위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재 학교 내 교권은 매우 낮다고 본다.
▲광천동 보안관(이하 보) = 교권이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학교를 다니는 동생이나 지인이 없지만, 뉴스나 곳곳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막 대하는 것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또, 우연으로 집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야, 우리 학교도 '교권보호위원회' 열린다는데? 어떤 학생 때문일까?"라며 친구에게 말을 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뉴스로만 접하던 소식을 초등학생들의 대화로 확신이 생겨버린 것이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신안동 몽둥이(이하 몽) = 교권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교사를 존중하지 않거나 권위를 무시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문제지만, 나는 그걸 악용하는 학부모가 더 문제라고 본다. 본인 아이만 귀한가..? 사소한 일에도 교사에게 과도한 민원을 제기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담임한테 전화하는 학부모들이 만든, 그리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은 현재의 법이 만든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체벌이 필요하다 VS 필요없다
▲비 = 어떠한 이유에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여기서 폭력은 상대를 파괴하거나 통제하는 행위다. 체벌은 폭력과 궤를 달리한다고 생각한다. 회초리 한 대가 한 학생의 인생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의도가 중요하다. 교사가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처벌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에 가깝지 않을까?
▲물 = 체벌이라는 단어가 주는 물리적인 폭력성에만 집착한다면 당연히 금지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올바른 '훈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말과 통제만으로는 선을 넘는 학생들의 행동을 바로잡는 데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명확한 기준과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호한 훈육 목적의 체벌은 꼭 필요하다 본다.
▲보 = (라떼는) 설명하자면, 초등학생 때는 고학년만 체벌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학원에서 숙제를 안 하면 퉁퉁한 나무 매로 손바닥을 맞았다. 이처럼 학원에서도 처벌이 가능했다. 중학생 때는 남자 선생님들께서 남자 학생들만 처벌했다.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처벌을 했다. 회초리로 발바닥 맞기, 출석부로 정수리 맞기 등등... 그래서 고등학교 때 군기가 바짝 들었던 것 같다. 요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어려서 저질렀던 내가 한 행동에 대한 대가, 조금의 벌은 정말 정말 필수 요소라고 생각한다.
▲몽 = 적당한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생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일정한 규칙과 책임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지도나 벌의 형태까지 모두 사라진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이게 아예 사라졌기 때문에 지금 교권이 이 모양이고 학생들 수준도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본인 자식을 아끼는 부모라면 가정에서라도 자녀에게 기본적인 예절과 책임감을 가르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실제로 교권 관련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기구'가 생긴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비 = 드라마 '참교육'에 나오는 기구는 교권의 회복보다는 '학생 지도 기구'에 가까울지 모른다. 문제는 잣대다. 학생을 올바르게 지도한다고 해서 교권이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웹툰이나 드라마에서는 주로 통쾌함을 보여주었기에, 현실 사회에서는 퍽퍽함이 먼저일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교권 문제를 해결할 기구가 생긴다면, 교사들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 =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처럼 현실에서도 교사를 지켜주고 망가진 교실 질서를 바로잡아 줄 든든한 해결사 같은 곳이 꼭 생겨야 한다. 무엇보다 악성 학부모의 무분별한 갑질이나 민원 공격으로부터 선생님들을 법적으로 철저하게 차단해 주는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통제가 안 되는 학생들을 교실에서 분리하거나 선생님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진짜 실질적인 지도 권한을 뒤에서 확실하게 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보 = [절차 수립 - 외부 세력에 구애받지 않는 환경 구축 – 참교육]. 단계로 기구가 운영됐으면 좋을 것 같다. 학생의 과도한 인권보다는, 선생님의 인권이 우선. 다시 선생님이 정말 선생님다운 시대가 돌아왔으면 한다.
▲몽 = '참교육'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똑같은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이 요즘 학생들, 학부모들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그 내용을 보고 "시원하다", "사이다 한 모금 마신 거 같다"라는 반응이 나올까. 만약 교사의 체벌이 흔했던 90년대에 이런 드라마가 나왔다면 아마 각광받지 못하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지금 낮은 교권, 학생들의 행패, 그리고 그들을 감싸는 학생의 부모님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으면 이럴까.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일을 하면 좋을 거 같다.
정리=박준서기자 junseo030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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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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