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인증샷 유행
한 개 사먹기도 어려워
직접 만들어 먹기도

요즘 디저트는 맛보다 먼저 화면에서 다가온다.
요즘 유행하는 ‘두쫀쿠’는 한때 유행했던 ‘두바이 초콜릿’에서 파생돼 국내에서 만들어진 디저트로, 피스타치오 크림으로 버무린 카다이프를, 마시멜로 반죽으로 감싼 형태의 쿠키다.
겉은 쫀득하지만 안은 바삭하다. 한 손에 쥐면 작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지고,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씹는 시간이 길어진다. 디저트지만 ‘간식’보다는 ‘하나의 메뉴’에 가깝다.
두쫀쿠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맛은 아니다. 대부분은 SNS에서 먼저 발견된다. 후기와 인증샷이 쌓이고, 디저트는 음식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 먹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름에 붙은 ‘두바이’는 이국적인 이미지를 덧댄다. 실제 맛보다 먼저 상상이 작동하고, 그 기대를 ‘쫀득함’이라는 식감으로 채운다. 요즘 디저트는 혀뿐 아니라 머릿속에서도 소비된다.
가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쿠키 한 개에 몇 천 원, 때로는 만 원에 가까운 가격표가 붙는다. 하지만 MZ에게 이 가격은 ‘비싼 간식’이 아니라 ‘한 번쯤 먹어볼 콘텐츠’다. 공유할 수 있고, 말할 거리가 되며,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면 지불할 이유는 충분하다.
누군가에겐 너무 달고 묵직한 쿠키일 수 있다.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이 과한 쫀득함이 바로 요즘의 감각이다.
두쫀쿠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 겨울 간식도, 여름 디저트도 아니다. 대신 ‘요즘’이라는 시간 위에 정확히 올라 있다. 빠르게 뜨고, 빠르게 회자되며, 각자의 후기로 다시 확장된다.
쫀득함 하나로 취향과 콘텐츠를 동시에 건드리는 쿠키.
이번에는 MZ의 테이블 위에 요즘 대란인 두쫀쿠를 올려봤다.
-두쫀쿠의 맛을 설명해달라.
▲쌍촌동 비룡(이하 비) = 점바점(점포 by 점포)이지만, 내가 처음 먹었던 두쫀쿠는 파우더가 없는 형태였다. 그래서 입에 묻는 게 없어 먹기 편했다. 그러나 ‘진짜’ 두쫀쿠를 먹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고로 두쫀쿠는 입과 손에 파우더를 묻히며 먹는 게 더 맛있는 것 같고, 한입에 먹기보다는 나눠 먹으며 원물이 어떤 모양과 색인지 비교해 가며 먹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문흥동 맛기사(이하 맛) = 겉피는 쫀득하고 달달한 초코 마시멜로인데, 개인적으로는 피가 무조건 얇아야 하고 뚝뚝 끊어지는 식감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에는 카다이프라는 재료가 들어가는데, 이를 볶아서 피스타치오 스프레드와 화이트 초콜릿을 섞어 소를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촉촉한 속을 선호해서, 피스타치오 스프레드의 비중이 높은 걸 좋아한다.
▲광천동 고독한미식가(이하 고) = 아직까지는 두쫀쿠가 질리지 않는다. 계속 계속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두쫀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얇은 마시멜로 피다. 전자레인지 5초를 돌리면 촉촉말랑 두쫀쿠가 되는데 이 상태로 꼭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팍팍해서 두쫀쿠의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요즘 먹는 방법은 작은 밀폐용기에 두쫀쿠를 가위로 4/8등분 해서 먹고 싶을 때 한 조각씩 먹는다. 그러면 부담스럽지도 않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신안동 상디(이하 상) = 코코아가루 묻어있는 찹쌀떡에 속은 바삭바삭한 카다이프와 은은한 피스타치오 맛이 나는 쫀득한 디저트. 맛은 솔직히 너무 유명하고 구하기도 어렵다고 해서 처음엔 엄청 기대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그 정도인가? 생각이 들 정도의 그냥 무난한 맛이랄까. 너무 달아서 한 개 이상은 못 먹을 것 같다. 사실 단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도 않아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두존쿠가 이렇게까지 한국에서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달라.
▲비 = 맛보다는 유행에 한 표를 던진다. 물론 맛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 맛도 사서 먹어봐야 느끼는 것. 신기한 식감이나 처음 먹어보는 맛을 ‘나도 느끼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구매하지 않나 싶다.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데에는 ‘재구매’보단 ‘첫 구매’의 비중이 큰 것 같다.
▲맛 =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그냥 먹는 법이 없다. 맛있는 음식도 더 맛있게 업그레이드해서 먹고자 하는 의지가, 지금의 두쫀쿠 대란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다. 특히 해외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즐기는 문화가 SNS를 중심으로 확산됐는데, 두바이 초콜릿을 시초로 한국 사람들이 더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음식인 두쫀쿠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고 = 나는 맛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지금까지 유행해왔던 것들 일종의 화제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존재하지는 못했다. 탕후루, 대만카스테라 등. 두쫀쿠는 한 번 먹을 때는 별로였어도 먹으면 먹을 수록 더 맛있고 더 중독되는 정말 사람 미치게하는 디저트이다. 물론 SNS에서 두쫀쿠를 좋아하지 않지만, 품귀현상 또는 희귀템이라고 생각돼 구매마다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나는 이 부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두쫀쿠의 온전한 맛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상 = 사람들 입맛에 적합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sns에서 유명해진 영향이 더 큰 거 같다. 또 일반 인플루언서가 아닌 유명한 아이돌들이 언급하고 난 이후 더 호기심도 커지고 너도나도 하나씩 먹어보려고 하다 보니 몇 시간씩 줄 서서 사야 하는 현상이 발생한 거 같다.
-단독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두쫀쿠와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은?
▲비 = 어디까지나 디저트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베이스가 조금 느끼하다고 생각한다. 느끼함을 잡고, 두쫀쿠의 풍미를 더 잘 이끄는 건 커피라고 자신한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도피오’가 가장 맛있다. 고급스러운 초콜릿 카페에서 모카 라테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달콤함과 씁쓸함이 차례로 밀려와 서너 개는 거뜬하다.
▲맛 = 개인적으로 초코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정말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투게더 아이스크림이랑 특히 잘 어울릴 것 같다. 두쫀쿠를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겉피를 말랑하게 만든 뒤,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올려서 먹으면 진짜 최고의 맛일 것 같다. 여유가 된다면 꼭 한 번 해 먹어보고 싶지만, 두쫀쿠 가격을 생각하면 다른 맛을 곁들여 먹는 사치는 아직은 무리다…
▲고 = 두쫀쿠와 잘 어울리는 조합은 단연 딸기다. 두쫀쿠 조각과 딸기를 함께 먹으면 그냥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두바이 수건 케이크’라고 들어봤는가. 흔히 아는 얇은 크레이프 반죽에 생크림과 두바이 초코 스프레드를 발라 돌돌 말아 먹는 디저트이다. 중국의 ‘수건 케이크’에서 파생된 건데, 어떻게 보면 모든 음식에 두바이 초코 스프레드만 가미하면 뭐든 두바이 디저트가 되는 셈이다. 어쨌든, ‘두바이 수건 케이크’도 심하게 맛있다. 두바이 쫀득 쿠키의 상위 버전이다.
▲상 = 맛있는 건 모르겠고, 너무 달아서 느끼하다 보니까 역시 그걸 깔끔하게 잡아주는 아메리카노와 같이 먹어봐야 할 거 같다. 상상 조합보다는 차라리 겉에 있는 코코아 가루를 다 씻어내고 먹어보고 싶긴 하다. 그럼 좀 나아질 거 같은 느낌

-두쫀쿠로 인해서 소상공인에게 큰 경제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비 = 동의한다. 밑 빠진 둑을 쫀득한 두쫀쿠 여러 개로 틀어막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렇게 ‘핫한’ 소재가 있었는가. 두쫀쿠를 처음 만들었던 사장은 사회에 큰 기여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적 창작물에 대한 지식 재산권을 본인만 소유한 게 아니라 소상공인 모두에게 풀지 않았나. 그로써 대한민국 전체를 넘어 두바이에까지 ‘역수출’ 열풍을 일으켰기에, 소상공인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맛 = 물론 경제 효과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현실은 두쫀쿠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재료값의 폭등과 품귀 현상, 이로 인해 판매량에 비해 순수익은 적은 상황이다. 여기에 유행이 워낙 빠르게 바뀌다 보니,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지금의 열풍이 오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두쫀쿠 열풍이 소상공인에게 마냥 긍정적인 효과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고 = 나는 무조건 Yes. 요즘 소상공인들이 다 힘들다고 하는데 두쫀쿠로 인해서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 같다. 디저트 가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밥집, 양식집 등 식품업종을 운영하는 사장님들께서 두쫀쿠 판매에 도전하고 있다. 두쫀쿠를 먹기 위해서 밥을 시키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이는 보기 드문 현상이며 현재 두쫀쿠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느낄 수 있다. 요즘 대기업이 역으로 두바이 디저트를 생산하는데, 나는 먹을 수 있는 두쫀쿠가 다양해져서 오히려 좋다. 그냥 두쫀쿠를 먹고 모두가 잠시나마 행복했으면.
▲상 = 처음에는 매출이 올랐다는 소식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판매 효과도 있었던 거 같다. 근데 지금은 소상공인분들 이야기도 직접 들어봤는데 원재료 가격이 급격하게 올라가서 오히려 감당하기 힘들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 두쫀쿠 한 개 가격이 1만 원 이상 하는 곳들도 다 원재료 값이 비싸져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이 올라가는 느낌. 오히려 나중에는 적자가 심해지지 않을까..
-앞으로의 두쫀쿠 향방은.
▲비 = 최근 광주 ‘두쫀쿠 1등’이라는 베이커리에 촬영하러 갔을 때, 사장님께서 ‘오늘은 좀 사람이 없다’라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도 오전 7시 30분부터 줄 섰던 인파 행렬이 12시쯤에나 끝이 났다.아직 두쫀쿠의 열기는 안 식는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두바이쫀득쿠키뿐 아니라 두바이 수건 케이크, 두바이 소금빵 등 여러 파생상품이 나오기에 당분간은 열기가 식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맛 = 디저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디저트들이 화두로 떠오른다고 해도, 지금의 열기가 완전히 식지는 않을 것 같다. 잠시 시들해질 수는 있겠지만, 한 번 맛본 사람들은 쉽게 잊지 못하고 또 찾게 되는 맛이기 때문에...
▲고 = 요즘은 설 선물 세트도 두쫀쿠로 나온다. 이건 정말 충격이었다... ^^ 두쫀쿠가 디저트를 넘어서 우리 사람 간의 관계도 형성 또는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정말 희한하고 이해하기 힘든 시기 같다. 두쫀쿠로 인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다. 적십자도 부족한 혈을 모으기 위해서 헌혈 시 두쫀쿠를 증정했다. 효과는 엄청났다. 두쫀쿠가 실생활 속 어려움까지 해결해 주고 있다. 두쫀쿠야 앞으로도 이 맛 변치 말고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만들어지렴. 고마워. 두쫀쿠야.
▲상 = 그동안 유행했던 음식들 몇 가지가 있는데 마라탕은 운 좋게 한 끼 식사로 자리 잡았지만 탕후루 같은 경우는 완전 반짝 뜨고 잊혀져버린 음식, 두쫀쿠도 뭔가 탕후루 노선을 타지 않을까 싶다.
정리=박준서기자 junseo030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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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 철도, 기숙사까지 허허벌판에 들어선 도시
1934년 경성일보가 8월 10일자로 보도한 종연방적 광주공장 설계 개요와 관련한 기사 내용은 조선 제일의 대공장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당시 임동공장 설계 보도에 따르면 철근 철골콘트리트 벽돌 구조물(일부 지하층) 총 연건평 칠천팔백삼십팔평, 굴뚝은 철근콘크리트, 건물 이십구평, 창고는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 구백구십일평, 창고 블라트폼 철골조 일백십팔평, 부속건물 목조 팔백팔평이다. 시멘트, 목재, 벽돌 등 재료는 회사 지급을 활용, 총공사비는 100만엔이다. 임동공장 공사비 100만엔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00억원에서 900억원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은행원이나 관원의 일반적 월급에 대입할 경우 1엔은 약 4만원에서 6만원에 해당된다.임동공장 보존건물 선정 TF를 이끈 천득염 전남대 명예교수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건물이 미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한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양면적 평가가 엇갈리는 곳이다”며 “공장안에는 발전소, 변전소, 자재창고, 철도 등 복합시설이 갖춰진 또 하나의 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연간 1천800만근(1만1천t)의 목화량이 필요한 것으로 설계됐다.1934년에서 1935년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따르면 임동공장은 조선 제일의 면화산지인 전남지역 연간 목화 수확량을 모두 투입해도 240일 가동량에 그쳤다. 공장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웅장한 건물에는 수 천명의 인력을 운영할 방직시설이 갖춰져 있었다.부산 범일동에 있는 조선방직 다음으로 전국 섬유업체 중 규모나 인력구성에 있어 큰 회사였다. 전통적 농업중심의 판을 깨는 산업시설이었다.러시아 건축사가 설계한 톱니모양 지붕을 얹은 형태의 직물 생산 공장 면적은 축구장 5개가 들어설 만큼 넓었다. 지붕은 한쪽 직각을 이루고, 반대쪽은 40% 기울기를 보였다. 북향 채광창을 둔 톱니형 지붕은 직사광선을 피하면서 작업장에 일정한 자연광을 들이기 위한 방직공장 특유의 설계였다. 온도 변화를 줄여 방적 과정에서 실이 끊어지는 것을 막는데도 유리했다.생산구역에서 작업실은 원활한 방적 방직공정에 맞춰 배치됐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건물은 1층이었다. 원자재, 반제품, 완제품을 반입하고, 이동하는데 인력이 적게 들게 하기 위한 설계였다. 목화묶음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단계의 방적공정을 거쳐 실이 되고 다시 직조공정을 거쳐 무명베로 만들어졌다.그러면 수천명이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공장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임동공장에서는 기계를 돌리는 전기는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200평의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발전소는 무연탄을 원료로 2천500㎾급 전력을 생산했다. 화력과 불을 사용해 증기를 발생시키는 기력발전소는 방적공장의 전기공급을 위한 산업용 민간 자가 발전시설이었다. 연료인 무연탄은 화순탄광에서 철도를 통해 공장 내부까지 들여왔다. 공업용수는 영산강 물을 사용했다. 화재에 대비해 고가수조까지 뒀다.보일러실의 고가 수조는 당초 2개였다. 화재발생시 진압하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였다. 물은 광주천이 아닌 영산강에 취수시설을 설치, 끌여왔다. 조선총독부는 거대한 임동공장을 가동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물을 영산강 수계에서 대규모 취수토록 했다.조선총독부와 전남도가 당시 지역 농민들의 농업용수나 자연생태계보다 일본 독점자본의 공장 가동을 최우선으로 막대한 인프라 특혜를 제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국가기록원에는 전남도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영산강의 물을 끌어들이는 공작물 설치 및 허가를 한 문서가 남아있다. 고가수조는 방직물의 특성상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않으면 공장 전체가 타버릴 우려가 있어 이에 대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1935년 공장 준공때부터 운행된 철도는 종연방적 임동공장의 주요한 운송 인프라였다. 화순탄광 석탄과 원료와 면제품 수송을 위해 개설됐다. 화순탄광에서 채굴된 석탄은 트럭에 실려 화순역까지만 수송됐고, 이후 열차에 실려 광주역을 거쳐 공장 내부 발전소까지 운반됐다.광주역은 현재 전남광주특별시 동구 대인동에 자리잡은 동부소방서 자리이다. 철도는 또한 면화와 제품을 외부로 실어날랐다. 1960년대 광천동 공단까지 연장돼 산업물자 수송에 활용되다가 1990년 폐쇄됐다.그러나 발전소도 철도도 스스로 공장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한 생산도시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수천명의 노동자였다. 그 대부분은 젊은 여성들이었다.이들의 주거시설은 기숙사였다. 임동공장은 적게는 2천명, 많게는 4천명의 노동자가 근무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노동자들의 숙소용으로 쓰인 기숙사는 여성용 목조단층건물 8동, 남자용 1동 사택 50호가 있었다. 1개동마다 16개의 방이 있었고, 각 방에는 14~15명이 수용됐다. 단순 계산하면 여성 노동자 약 1천800~1천900명을 동시에 수용할수 있는 규모다.여성 기숙사는 건물의 중심부에 위치, 수많은 건물과 담에 포위된 양상을 띠었다. 이 기숙사들은 종연방적이 1961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두 개 회사로 분리 당시에 남측 기숙사는 전남방직, 북측 시설과 공간은 일신방직으로 넘어갔다. 1980년 발행된 광주시사에는 ‘1961년 전방과 일신방직으로 분리된 두 회사는 남측에 전방, 북측에 일신방직이 자리잡았다’고 기록돼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기숙사는 1970년 철거됐다. 이후 기숙사는 철근콘트리트로 지어졌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규모는 아니었다.공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공장 내부와 주변에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수영장, 종교시설, 학교까지 들어섰다. 생산시설로 출발한 종연방적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된 것이다. 1938년 공장내에 수영장이 건설됐다.광주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명목이었다. 1945년 11월에는 전방교회가 김형남에 의해 설립됐다. 전방교회는 기숙사 2층에서 예배를 시작으로 유치원으로 장소를 옮겼고, 1948년 예배당을 신축했다.2002년까지 방직공장 서쪽에는 전남중·고가 있었다. 전남중·고는 1951년 문을 연 광주공과기술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공과기술학교는 방직공장이 세운 사립학교였다. 공과기술학교는 1958년 전남중학교로 변경했다.1935년 일본 자본이 세운 공장에 해방 이듬해 노동자 1천700명이 15m 태극기게양대를 세웠다. 노동자들이 뜻과 돈을 모아 일본 자본이 세운 회사에 국권회복의 상징을 세운 것이다. 건물 대부분은 이제 사라졌고 태극기 게양대도 개발을 위해 철거돼 보관중이다.1930년대 이후 280여채에 달했던 건물은 이제 5개 시설만 남았다. 발전소도 철도도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목조 기숙사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건물만으로 종연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거대한 공장을 하루 24시간 움직인 중심에는 기계앞에 섰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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