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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어선 습격···육지서 못다한 항일투쟁, 바다서 맹위 떨쳐

입력 2023.12.03. 15:42 이관우 기자
⑭남도 의병 학술포럼
신혜란 박사, 해상의병 활동 사실 알려
"지도, 진도, 완도 등지서 日어선 습격"
"육지서 의병 활동하다 유배된 군인 등이 주도"
日, 군함 동원해 진압하려 했지만 항전의지 못꺾어
남도 의병 학술포럼이 지난달 30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 중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송인정(광복회 전남지부장) 좌장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⑭남도 의병 학술포럼

한말 남도 의병이 도서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심지어 지역에서 의병 연구를 한다는 학자나 전문가들마저도 관련 언급을 한 적이 없을 정도다. 그동안 남도 의병이 특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진 탓에 그런 점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남도 의병은 여전히 밝혀질 내용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말 한국 의병사를 되짚어보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남도 의병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남도의병 학술포럼이 지난달 30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 4층 중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포럼은 개회식과 기조발표, 주제발표, 종합토론 등 순으로 진행됐다.

'한말 전남 의병과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한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의 기조발표에 이어 장우순 박사(성균관대학교)의 '전라도 을미의병의 사상적 배경', 신혜란 박사(한양대학교)의 '일제침략기 전남 도서지방 의병투쟁'이 주제발표가 있었다.

종합토론은 송인정 광복회 전남지부장이 좌장을, 고재청 광주전남충의사현창회장과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기조발표에 나선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남도 의병의 시기를 을미, 을사, 정미 등 간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실제 의병들의 활약시기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남도 의병의 구체적 활동상을 시기별로 설명했다.

특히 "을미, 을사, 정미 세 시기에 모두 활동했던 고광순 의병부대가 지리산으로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동시켜 전북에서 거의한 김동신 의병부대와 손을 잡고 장기전을 도모한 전략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그동안 주목하지 받지 못한 영암 의병의 역사적 실체도 알렸다. 그는 "심남일이 조직한 '호남의소'의 핵심을 영암 의병이 담당했다"면서 "국사봉에 호남의소 본부가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여러 기록을 통해 입증됐다"고 말했다. 이어 "호남의소 본부에 대포가 6문이나 있어 일본군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영암 의병이 영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벌인 전투를 사례로 들며 영암 의병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국내에서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 가운데 영암 의병이 가장 활발했다고 한다. 특히 2년 동안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고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진과 합진이라는 부대 운용을 했기 때문"이라면서 "남도 의병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고, 이들의 빛나는 항일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투쟁의 에너지가 응축돼 3·1운동,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남도 의병 학술포럼이 지난달 30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 중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박해현 교수가 기조 발표을 하고 있는 모습.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첫 주제발표는 '전라도 을미의병의 사상적 배경'을 주제로 장우순 박사는 진행했다. 그는 을미의병이 단발령 때문에 촉발됐다는 기존 연구들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을미의병은 단발령 이전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원인이 됐다"면서 "하지만 전라도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단발령 시행 이후에 봉기했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남도의 을미의병을 촉발한 기우만이 한 말이 단발령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한 기우만의 의중은 '성리학 질서의 붕괴를 염려한 것'이라고 장 박사는 주장했다

마지막 주제발표는 신혜란 박사가 '일제 침략기 전남 도서지방 의병투쟁'이란 주제로 진행했다.

신 박사는 박해현 교수와 전남도의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사업을 통해 500명이 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신 박사는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과정에서 의병 전쟁이 한창이던 1908~1909년 무렵 전남의 여러 섬들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맞선 해상 의병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계속 드러나 남도 의병의 성격과 활동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또 "정미의병은 1907년 7월 20일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됐다. 그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난 의병이었다"면서 "이 항일의병투쟁은 전라도 의병이 주도했고, 교전 회수와 교전 의병수 모두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남에서 투쟁이 일어난 주요 도서지역은 지도, 진도, 완도, 칠산탄, 법성포, 위도, 격음도, 석만도, 소치자도 등이다. 의병의 중심 인물들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섬으로 유배된 의병장, 애국지사, 해산 군인, 일반 주민 등 다양했다"면서 "이들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무장투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

신 박사는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의병 진압에 나섰다"면서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9월 '총포 및 마약류 단속법' 제정 및 병력을 증강하고, 수비대와 헌병대를 비롯해 변장정찰대 등을 조직했지만 항전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도서지방 의병은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혈전을 펼쳤다"면서 "해상에서의 투쟁이 맹위를 떨치자 일본은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되지 않은 의병들을 상대로 팔중산, 추진주와 같은 군함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해상 의병까지 구축된 남도 의병들이 격렬하게 항전하자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이날 종합토론에선 송인정 광복회 전남지부장의 사회로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토론에 나선 고재청 광주전남충의사현창회장은 "남도 의병에 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중심이 내륙 위주의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다는 지적을 피해 갈 수 없다"면서 "도서지역에서 전개된 의병투쟁의 전모를 살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인 가운데, 신혜란 박사의 이번 주제발표는 전남 도서지역의 의병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전했다.

이관우기자 redkcow@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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