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란 박사, 해상의병 활동 사실 알려
"지도, 진도, 완도 등지서 日어선 습격"
"육지서 의병 활동하다 유배된 군인 등이 주도"
日, 군함 동원해 진압하려 했지만 항전의지 못꺾어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⑭남도 의병 학술포럼
한말 남도 의병이 도서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심지어 지역에서 의병 연구를 한다는 학자나 전문가들마저도 관련 언급을 한 적이 없을 정도다. 그동안 남도 의병이 특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뤄진 탓에 그런 점도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남도 의병은 여전히 밝혀질 내용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말 한국 의병사를 되짚어보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남도 의병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남도의병 학술포럼이 지난달 30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 4층 중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포럼은 개회식과 기조발표, 주제발표, 종합토론 등 순으로 진행됐다.
'한말 전남 의병과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한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의 기조발표에 이어 장우순 박사(성균관대학교)의 '전라도 을미의병의 사상적 배경', 신혜란 박사(한양대학교)의 '일제침략기 전남 도서지방 의병투쟁'이 주제발표가 있었다.
종합토론은 송인정 광복회 전남지부장이 좌장을, 고재청 광주전남충의사현창회장과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기조발표에 나선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남도 의병의 시기를 을미, 을사, 정미 등 간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실제 의병들의 활약시기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남도 의병의 구체적 활동상을 시기별로 설명했다.
특히 "을미, 을사, 정미 세 시기에 모두 활동했던 고광순 의병부대가 지리산으로 대규모 의병부대를 이동시켜 전북에서 거의한 김동신 의병부대와 손을 잡고 장기전을 도모한 전략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그동안 주목하지 받지 못한 영암 의병의 역사적 실체도 알렸다. 그는 "심남일이 조직한 '호남의소'의 핵심을 영암 의병이 담당했다"면서 "국사봉에 호남의소 본부가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여러 기록을 통해 입증됐다"고 말했다. 이어 "호남의소 본부에 대포가 6문이나 있어 일본군이 감히 넘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영암 의병이 영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벌인 전투를 사례로 들며 영암 의병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국내에서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 가운데 영암 의병이 가장 활발했다고 한다. 특히 2년 동안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고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진과 합진이라는 부대 운용을 했기 때문"이라면서 "남도 의병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고, 이들의 빛나는 항일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투쟁의 에너지가 응축돼 3·1운동,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첫 주제발표는 '전라도 을미의병의 사상적 배경'을 주제로 장우순 박사는 진행했다. 그는 을미의병이 단발령 때문에 촉발됐다는 기존 연구들에 의문을 표했다. 그는 "을미의병은 단발령 이전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원인이 됐다"면서 "하지만 전라도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단발령 시행 이후에 봉기했다"고 말했다.
정 박사는 남도의 을미의병을 촉발한 기우만이 한 말이 단발령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한 기우만의 의중은 '성리학 질서의 붕괴를 염려한 것'이라고 장 박사는 주장했다
마지막 주제발표는 신혜란 박사가 '일제 침략기 전남 도서지방 의병투쟁'이란 주제로 진행했다.
신 박사는 박해현 교수와 전남도의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사업을 통해 500명이 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신 박사는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과정에서 의병 전쟁이 한창이던 1908~1909년 무렵 전남의 여러 섬들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맞선 해상 의병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했다"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계속 드러나 남도 의병의 성격과 활동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또 "정미의병은 1907년 7월 20일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됐다. 그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난 의병이었다"면서 "이 항일의병투쟁은 전라도 의병이 주도했고, 교전 회수와 교전 의병수 모두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남에서 투쟁이 일어난 주요 도서지역은 지도, 진도, 완도, 칠산탄, 법성포, 위도, 격음도, 석만도, 소치자도 등이다. 의병의 중심 인물들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섬으로 유배된 의병장, 애국지사, 해산 군인, 일반 주민 등 다양했다"면서 "이들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무장투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
신 박사는 "일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의병 진압에 나섰다"면서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9월 '총포 및 마약류 단속법' 제정 및 병력을 증강하고, 수비대와 헌병대를 비롯해 변장정찰대 등을 조직했지만 항전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도서지방 의병은 끊임없이 동시다발적으로 혈전을 펼쳤다"면서 "해상에서의 투쟁이 맹위를 떨치자 일본은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훈련도 되지 않은 의병들을 상대로 팔중산, 추진주와 같은 군함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해상 의병까지 구축된 남도 의병들이 격렬하게 항전하자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이날 종합토론에선 송인정 광복회 전남지부장의 사회로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토론에 나선 고재청 광주전남충의사현창회장은 "남도 의병에 관한 연구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중심이 내륙 위주의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다는 지적을 피해 갈 수 없다"면서 "도서지역에서 전개된 의병투쟁의 전모를 살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인 가운데, 신혜란 박사의 이번 주제발표는 전남 도서지역의 의병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전했다.
이관우기자 redkcow@mdilbo.com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 · 영암 의병, 조국 독립을 위해 민족의 魂을 깨우다
- · 임진왜란부터 한말 의병전쟁까지 빛나는 대일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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