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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의병, 조국 독립을 위해 민족의 魂을 깨우다

입력 2023.11.29. 17:25 이관우 기자
⑬ 이태룡 강연- 영암 의병 투쟁
일본조사 순국 의병만 1만3천명
의병계열 독립유공자 전체 15%
박사화 등 남도의병장들 사진 공개
처형 기록 담긴 '통감부래인' 입수
미서훈자 많아 정부 차원 관심 필요
30만 의병 독립투쟁은 유례 없는 일
남도 의병사령부 영암 연구 절실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 지난 23일 영암문화원에서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⑬이태룡 강연- 영암 의병 투쟁

한말 항일투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암 의병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남도 의병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영암은 항일의병투쟁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활약한 영암 의병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영암 의병의 상당수는 여전히 미서훈 독립유공자로 남아 있다.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이 지난 23일 오후 영암문화원 공연장에서 열렸다.

남도 의병 학술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강연은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이 강사로 나섰다.

이태룡 소장은 국내에서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35년 넘게 의병과 독립운동사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020년 4월 출범한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국내 대학 최초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기 위해 운영되고 있는 연구소다.

이태룡 소장은 연구 책임자로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4번에 걸쳐 독립유공자 2천60명을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서훈신청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의병사 상·하',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1~4', '우리의 역사, 이것이 진실이다', '민족지도사 석주 이상룡' 등 27종 38권의 저서와 20여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지난 23일 영암문화원에서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열린 대중강연 참석자들이 강연을 듣고 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이 절정기였던 1908년 가을 호남의병단의 결성 과정을 담은 '일제침략기 호남동의단 결성 전후 66인의 호남의병장' 책을 출간했다.

이태룡 소장은 이날 강의에서 "외세가 침략했을 때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소장은 "1907년 10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본격화된 의병 투쟁에 맞서 일본군 정규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됐다"며 의병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 규모를 상세히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용산에 주차한국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용산은 임오군란 후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처음 주둔한 곳이다.

사령부 산하 남부수비관구에는 보병 2·14·47연대와 한국파견기병대가 있었고, 북부수비관구에는 보병 13·23·27·45·64연대와 기병 6연대, 야포병 6연대, 공병 6대대가 있었다. 특히 북부수비관구에 포병대가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1907년 7월에는 경남 진해만에 중포병대대를, 1909년 6월에는 남부수비관구에 14연대 대신 보병 제12여단과 보병 3연대를 영남에, 보병 1연대를 호남에 배치했다.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 지난 23일 영암문화원에서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의병 진압으로 인한 사상자 규모는 1만명을 웃돌았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한국주차일본군사령부, 즉 일본군 조사에 의하면 순국한 의병은 1만3천445명"이라면서 "그런데 국내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의병이 7천717명에 그친다. 이는 전체 서훈자의 15.2% 수준으로, 일본군 통계와 비교해 본다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공개한 독립유공자 본적지별 현황에 따르면 경상도가 3천917명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가 2천621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이어 평안도 2천369명, 충청도 2천266명, 미상 1천550명, 경기도 1천441명, 함경도 1천388명, 황해도 830명, 강원도 642명, 서울 531명 등 순이었다.

이 중 전라도는 후손이 끊어지거나 서훈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 실제 독립유공자 수보다 적을 것이라는 게 이 소장의 의견이다.

등급별 의병 공적 포상자는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3명(이강년, 최익현, 허위), 2등급 건국훈장 대통령장 14명(문태수, 이인영, 전해산 등), 3등급 건국훈장 독립장 165명(고광순, 김태원, 서병희 등), 4등급 건국훈장 애국장 1천407명(강사문, 백운하, 서두성 등), 5등급 건국훈장 애족장 794명(강대여, 김영엽, 서상룡 등), 6등급 건국포장 238명(김병주, 김학수, 양방매 등), 7등급 대통령표창 96명(김공서, 유해용, 하천일 등)이다.

이 소장은 의병 연구과정에서 발굴한 귀중한 사진과 자료도 공개했다.

사진 중에는 광주감옥에 투옥된 남도 의병장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었다. 나주의병의 전설이 된 박사화, 영암 의병 양방매의 남편 강무경, 호남의소 사령관 심남일 등 귀에 익은 얼굴이 이름과 나와 있었다.

이 소장은 "광주감옥에 투옥된 의병장들의 사진은 제가 일본에서 직접 찍은 원본이다. 여러 매채 등을 통해 공개된 사진과 달리 원본에는 사진 아래 부분에 한자로 의병장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면서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의병장들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옥에서 찍힌 사진으로 추청된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을사늑약 이후 일제 통감부로부터 대한제국 의정부에 보내온 문서들을 담은 책 '통감부래안'이 있다고 했다.

그는 "통감부래안을 직접 입수해 처음 공개한 뒤 번역을 마쳤다. 이 책에는 처형 기록이 남은 의병·의병장 중 미서훈자가 많았다"면서 "국가보훈처에 이들 미서훈자의 서훈을 촉구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서훈을 받으려면 제적등본이 필요하지만 후손이 없거나 일제 치하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서훈을 받을 수 없었다"며 "지금과 같이 후손들에게 서류를 받는 소극적인 자세로 서훈하지 말고 보훈처나 각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의병을 찾아 공적을 서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을 학살했다. 이름 없는 의병은 즉결 처분하고 공적을 내세울 만한 의병장 등은 재판에 부쳤다"면서 "100여 년 전 30만명 넘는 의병이 국권 회복을 위해 싸운 것은 세계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23일 영암문화원에서 '일제침략기 영암의 의병투쟁'을 주제로 열린 대중강연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어 "정부가 서훈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영암 출신이거나 영암에서 활동한 의병으로 분류돼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원은 14명에 불과하다"면서 "현재 전남도에서 실시하고 있는 미서훈자 발굴 용역 사업을 통해 의병 부문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의병 관련 자료를 묶으면 12권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강연에는 김한남 영암문화원장과 최기욱 전 영암향교 전교, 이영현 영암학회 회장을 비롯해 군민들이 참석했다.

이관우기자 redkcow@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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