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칼럼] 도시의 삶과 공공 공간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입력 2024.08.15. 18:00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공공 공간은 영어로는 '퍼블릭 스페이스(Public Space)'라고 하고, 한자로는 공평할 공(公)자에 함께 공(共)자를 쓴다. 결국 공평하게 같이 사용하는 공간을 의미하며,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성별과 나이, 인종과 민족, 계층과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차원의 차별이 중첩되어 있었던 중세적 한계를 넘어서자는 근대적 공간 만들기 프로젝트였으며, 근래의 논의는 소유권과 사용권에 대한 부분에 집중되고 있다.

공유 공간은 공용, 사유 공간은 사인의 전용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공간을 담고 있는 도시와 건축은 토지에 정착되어 있는 고정된 것이고 공기나 물과 같이 공동체가 같이 사용해야 하는 제한된 자원이기 때문에, 사유 공간이라고 해서 제한 없이 사적 이용을 보장할 수는 없다.

길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공공 공간이다. 산은 물론 바다에도 임자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길은 일찍부터 사유 공간의 사이에 위치하는 공유 공간이었다.

특히 논농사의 발달로 토지의 극단적 고밀 개발이 이뤄졌던 조선 후기에도 '길'만큼은 남아서 마을 구석구석의 집들을 연결하는 소통의 공간이자 놀이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우리의 대표적인 집단 놀이인 줄다리기는 바로 이런 길이라는 공간적 조건에 맞춰 발달한 것이다. 목축이 발달하였고, 그래서 공용의 목초지를 공유하는 영국에서 축구나 골프가 발달한 것과 대비된다. 그러고 보면 근대 공원의 시원 역시 공유의 목초지였다.

한편 광장과 공원은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다. 광장은 오랜 역사를 가지며, 또 대개는 권력의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에 비해 공원은 근대에 새로 만들어진 도심 내 여유지로서, 탄생 초기에는 가로수가 심어진 큰길과 함께 실업자를 위한 직장이라고 조롱받기도 했지만, 그게 어디 놀릴 일인가.

큰 광장 말고도 유럽 도시들을 가면 도시 곳곳에 작은 광장들이 있다. 통행량이 많은 교차로 주변, 우물이 있는 곳, 혹은 도로변의 집들로 둘러싸인 안마당과 같은 곳에 겨우 농구 코트 한두 개 들어갈 만한 크기의 공터가 있어, 바닥을 예쁘게 포장하고, 나무 한두 그루 심고, 그늘에 의자를 둔 곳이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주변의 주민들이 나와 긴 의자에 앉아 장기를 두거나 뜨개질하며 오후를 즐기는 공동의 거실이다.

우리의 전통 도시에서는 산과 강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서울과 같은 도성은 물론이고 전국 어디를 가나 구불구불하게 뻗은 강과 산을 피하기 어려웠던 우리의 산천에서 산과 강은 도시 내의 부족한 공공 공간을 공급하는 대체재였다.

산에는 꽃도 피고, 계곡이 있어 땀을 씻을 수 있고 또 산소와 절, 산신과 도깨비가 있는 신화의 공간이기도 했다. 심지어 집안 대청마루에서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산은 그 역할을 다했다.

또, 도심 내를 흐르는 개천과 그 개천들이 모여 흘러 나가는 강은 생활과 농사에 필요한 수원이기도 했지만, 잠시 생업을 잊고 여유를 부리는 휴식을 제공해 주는 완충지였다. 결국 농사도 못 짓고, 집도 지을 수 없는 곳이 먹고사는 일 다음의 생활을 온전하게 담아낸 것이다.

그런데 산을 깎고 땅을 파고 개천을 덮는 것이 다 가능해진 근대의 도시는 전통적인 여유지를 모두 개발의 대상지로 바꿔놓았고, 주변부의 산과 강도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도심부로 편입하였다.

보행 중심의 원도심은 쇠락하고 자동차 중심의 신도심이 주변부에 개발되었지만, 아파트 단지와 대형마트와 상가로 구성된 신도심에서 먹고 사는 일 너머의 생활을 담는 여유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다.

1990년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불을 넘어설 때 다들 자가용 자동차를 사서 주말마다 도시를 벗어났고, 2000년대 초 2만불을 넘었을 때, 그래서 전국이 개발의 광풍으로 여유로운 산과 강이 다 사라졌을 때 해외여행이 붐을 이뤘다. 둘 다 현실에서 탈출하는 수단이었다.

이제 3만불을 거쳐 4만불의 시대에 근접하였는데, 행선지가 더 확장되어 지구촌의 오지와 해외도시 뒷골목에까지 이른 것 말고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우리의 도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 먼저여야 하고 그것은 공공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공유 공간을 새롭게 확보하고 사유 공간의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 둘 다 구성원의 동의가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들지만,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근대 도시에서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양식을 만드는데 그 정도의 비용은 치러야 한다.

대표적인 공공 공간이지만 공무원들의 사유 공간처럼 사용되는 시청보다 모든 시민이 이용하는 철도역과 터미널·시장을 짓는 데 더 많은 세금을 써야 한다.

서점과 미술관 같은 문화 시설은 공유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서라도 동네마다 있으면 좋겠고, 도심부의 상업 시설 1층과 아파트 단지의 경계부에 주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과 녹지를 마련하면 우리의 삶의 질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 늘어나면 우리의 삶은 좀 더 공평해질 것이다.

"모든 사회는 제각기 안락함의 정도가 있으며, 그것은 기술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당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는 세계의 여러 문명을 비교한 올더스 헉슬리의 말이다. 안락함을 삶의 질로 바꾸면 더 쉽게 이해된다. "모든 사회는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이 있으며, 그것은 경제적 조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당 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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