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칼럼] 도시에 대한 새로운 시선 - 공간에서 장소로 -

@송태갑 전남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입력 2024.05.16. 18:02
송태갑 (전남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장소, 요컨대 어느 터(基)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고유한 무늬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터마다 지형지세가 다르고 또 역사와 풍경이 같을 리 없으며 주변 환경이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기 전에 터를 고르고 또 그 터에 걸맞은 공간이 형성될 때 그 터는 고유한 장소성이 유지되고 발휘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장소 등에 걸맞지 않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발생할 때 흔히 '터무니없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동안 각종 개발과정에서 터의 무늬를 무시하고 인간의 편의적 발상이나 경제적 효율 등을 앞세우며 도시의 원풍경(原風景)을 훼손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발생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그 터를 지켜온 사람들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텃세라도 부려야 하는 것 아닐까.

도시에 존재하는 산, 들, 호소, 강, 바다 등은 독립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연결성 측면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 풍경들의 완전체가 도시 혹은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 도시들은 획일적이고 매력도 없고 기억할만한 장소도 없이 그저 건축물이나 구조물을 담아내는 회색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일까? 더 한심스런 일은 도시에 대한 비전도 없고 목표도 없고 전략도 없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기대감조차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

도시를 형성하는 두 개의 축인 생태와 경제는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家庭)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정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IKOS'는 영어 'ECO'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 'ECO'는 'ECOLOGY(생태)'와 'ECONOMY(경제)'라는 두 단어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생태와 경제는 서로 대립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태를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개발을 위해서는 생태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가운데 생태보다는 개발의 입장에서 도시를 건설한 측면이 있었고 그 결과 도시의 녹지나 하천, 호소 등 장소성의 근간이 되는 적지 않은 원풍경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하나는 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문제를 들 수 있다. Culture(문화)는 '경작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Cultivate'라는 단어에서 유래하고 있다.

문화도시를 창조한다는 것은 작물을 경작하듯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며 열매를 수확할 때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정성을 다해 일구어내는 일종의 땀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그 도시의 얼굴이고 상품이다. 문화가 예술을 만나면 문화예술이 되고 문화가 산업을 만나면 문화산업이 된다. 그런데 문화를 마치 유행이나 일시적 트랜드 쯤으로 여기는 것인지 도시를 가꾸는 데 있어서 한시적인 이벤트나 상업적 디자인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문화나 역사는 이야기의 축적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이야기(Story)에 기반을 둔 역사성이나 지역 고유의 원풍경 등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만능주의는 인간의 존엄성, 생태적 순환성, 사회공동체의 연대감 등을 약화시키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영향으로 지식과 기술이 전문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분화된 전문가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런 분화된 전문가 시대는 종합적 완성도가 요구되는 도시를 건설하는데 오히려 장애요인이 되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그로 인해 공간을 상품화하는 데는 성공을 했거나 기능적 편의성이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공간 디자인 측면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종합적으로 도시를 명소화하거나 브랜드화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도시의 장소성을 해치는 요소로는 먼저 갈수록 초고층화한 것도 모자라 품격 없는 디자인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아파트와 같은 무분별한 건축물들을 들 수 있다. 또 도시건설 과정에서 현대적 요소들로 채우면서 기존의 자연, 역사, 문화적 요소 등을 사라지게 한 일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게다가 물이 흐른다는 것 외에 아무런 장소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하천, 도시를 재생한다면서 담벼락 여기저기에 생소한 그림으로 채색하는 페인팅 벽화들, 공동체 연대강화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의미 없는 이벤트와 축제들은 도시의 정체성을 잃게 하고 매력 없는 도시공간을 양산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민공동체의 역동적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공원이나 정원, 광장, 보행자도로 등의 확충은 미흡하면서도 아무런 감동도 없는 폴리(Folly)나 조형물들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며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도시행정을 들 수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환경, 사회, 문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시대의 유물인 분화된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자연, 역사, 문화, 그리고 도시의 주인인 시민공동체 등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아름답고 품격 있는 장소로 가꾸어가야 한다.

도시의 수준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설령 도시민들의 지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도시행정을 관장하는 지자체의 의식 수준이나 리더십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결코 도시에 좋은 장소들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다. 또 기업들이 경제 우선주의 논리에 기반한 도시건설에서 탈피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살기 좋은 도시, 나아가 경쟁력 있는 도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터무니없는 개발행위는 그칠 줄 모르고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계획, 설계, 시공, 관리에 관한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또 하나의 흉물을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시민이나 방문객들이 매력을 만끽할만하고 기억될 만한 장소성을 갖춘 도시로 가꾸어나가기 위해 현명한 집단지성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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