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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멸망시기, 연구방법 이해차" vs "마한 존속기간 연장, 학자 의견에 불과"

입력 2023.09.06. 20:03 이관우 기자
[전라도천년사 논쟁 지상토론회] ③마한사
박중환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

[전라도천년사 논쟁 지상토론회] ③마한사

◆ 박중환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

백제본기 '마한 멸망 앞당겼다' 중론

中·日 역사서, 서기 9년 이후 등장

역사 복원 한계…中·日 역사서 활용

다른 역사 복원 기록 부인하는 격

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해 쓰여졌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오해는 역사연구 방법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 같다.

과거 전라도 지역은 오랜 시간동안 백제의 땅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기록에 나와 있다 .

이 역사서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멸망해서 사라졌다'고 쓰여 있다. 또한 30여 명의 백제 왕들이 재위하는 동안 '마한'에 대한 언급이 일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백제 측에서 남겨놓은 기록을 토대로 한 백제본기 기록은 백제 측에서 마한을 완전 멸망시킨 시기를 매우 과장해 놓은 것으로 역사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그 전후 사정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남쪽에 있던 마한세력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겪은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어려움이 마한 멸망시기를 과장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백제본기의 마한기록의 오류는 삼국사기 안에서도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록들에는 마한이 멸망했다는 서기 9년 이후에도 마한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역사서가 아닌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들에서도 마한의 존재를 늦게까지 파악할 수 있다.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에서 출발한 부족국가 백제가 건국 후 불과 27년 만에 한반도 서남부 전역을 점유했다는 말 자체가 우선 상식적이지 않다.

삼국사기 안에서도 신라본기에서는 신라가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를 532년에 가서야 정복했고 고령의 대가야까지 정복해서 낙동강 유역을 모두 확보한 것이 562년이었다고 썼다.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장악한 것이 562년이었는데 백제가 경기·충청·전라지역 전체를 서기 9년에 모두 영유했다면, 백제의 최대판도 달성이 신라의 낙동강유역 확보보다 553년이나 빨랐다는 말이 된다.

553년이란 시간은 백제로부터 통일신라시대를 지나고 고려초기도 지나고 고려중기에 이를 만한 장구한 시간이다. 과장된 것이다.

백제 측 기록이 마한의 정복과정을 이처럼 이른 시기에 통째로 달성된 것처럼 써 놓았기에 한강에서 금강과 만경강과 영산강을 거쳐 남해안에 이르렀을 백제 확장과정의 실제 모습을 삼국사기에 의해 복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때문에 충청·전라도지역 고대 역사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삼국지'·'후한서'·'진서'·'양직공도' 그리고 일본의 '일본서기' 등 해외자료를 연구하고 곳곳에 남은 기록들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

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비판은 전라도 고대 역사의 실제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인용한 위의 여러 역사서 가운데 일본서기를 인용했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상반된 두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측면은 일본왕실을 추켜올리기 위해 한반도의 여러 왕들이 마치 자기들의 신하였던 것처럼 왜곡해 놓았다. 연대도 뒤바꾼 곳이 많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두번째 측면이 있다. 일본 왕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한 일본서기의 원전자료들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가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기록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모르타르로 뒤섞어 벽을 쌓았지만 그 속에 반짝이는 원석 조각들이 수없이 파묻혀 있는 것과 같다.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이나 불교를 전해준 노리사치계 이야기도 일본서기 기록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백제의 세 역사책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 기록도 일본서기 곳곳에 인용문 형태로 남아 있어 삼한과 삼국역사 연구의 희귀자료가 되고 있다.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 이야기나 무령왕릉 지석의 발견으로 그 사료가치가 입증된 무령왕 출생기록도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 측 원전 속에 들어있다. 이 기록들을 모두 버릴 것인가.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는 일본서기 문제점인 '일왕을 추켜세운 서술표현'과 '문투가 거짓이고 왜곡'된 것임을 전제로 일본서기 기록을 다루고 인용해 왔다.

백제왕을 자신의 신하인 듯 왜곡한 서술방식과 일본서기 기록 속에서 마한과 관련해 그 주체를 뒤바꾼 일본의 군사활동도 사실 백제의 군사활동이었음을 뚜렷하게 지적했다.

일본서기의 서술표현과 자기과시적 문투가 거짓이고 왜곡된 것임은 한국 역사학계뿐 아니라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상식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전라도천년사가 식민사관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본서기를 인용했다. 그러니 너는 식민사학자'라는 식이다. 얼마나 단순한 판단이고 비학문적인 문제제기인가.

기록의 비판을 거쳐 동아시아 학계와 구미학계가 이미 학술자료로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일본서기를 두고 왜곡된 표현만을 시비 삼아 식민사학자로 매도한다면 우리나라에서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고대 역사 연구가 어떻게 진전될 수 있을 것인가.

이덕일 순천향대 대학원 교수

◆ 이덕일(순천향대 대학원 교수)

편찬위, '백제본기' 마한 기록 부인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마한=고구려'

천년사, 멸망시기 틀려 조작 의심

멸망시기 의도적 늘린 이유 뭔가

역사학은 사료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그럼 마한에 대해 사료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에 따르면 최치원(857~?)은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한은 곧 고구려고, 변한은 곧 백제고,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라고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지리지'는 최치원의 이 말에 대해 "사실과 가깝다고 할 만 하다"고 덧붙였다. 김부식을 비롯한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마한=고구려'라고 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전라도천년사 편찬위원회를 비롯한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마한을 백제의 '전신'이라고 주장한다. 한백겸은 광해군 8년(1616) 경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라고 썼는데 이를 근거로 든다.

한백겸은 반도사관에 기초해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을 반도 남부로 축소했는데 이를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받아들이고 광복 후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받아들여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그러나 삼한에 대한 기본 사료인 중국의 '삼국지'·'후한서'는 모두 삼한의 강역을 "사방 4천리"라고 말하고 있다. 고구려를 포함해야 사방 4천리가 된다.

현재 사방1천여 리에 불과한 충청·전라·경상도 땅에 삼한을 우겨넣고 '정설'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는 사료와 크게 배치되는 주장이다.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신라를 계승한 것으로 여겼던 고려 유학자들이 편찬했기 때문에 신라사는 비교적 자세하고 백제사는 비교적 소략하다.

그러나 마한과 백제의 관계만큼은 아주 자세하게 써놓았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에는 마한이 무려 여덟 번이나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온조왕 때 백제와 마한에 대해서 많은 사료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 온조왕 때의 마한 기록은 맥락이 있다. 백제는 원래 마한이 동북땅 1백리를 떼어주어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 온조왕은 신비로운 사슴을 잡자 마한에 보내고 말갈 추장을 생포해서 마한에 보내는 등 상국으로 모셨다.

그러나 마한이 점점 약해지자 온조왕은 재위 26년(서기 8) 7월 '다른 나라가 마한을 차지하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격이니 백제가 먼저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10월 마한을 습격해서 수도를 차지했다. 이 때 원산·금현 두 성만 함락되지 않았는데, 이듬해인 온조왕 27년(서기 9) 4월 "두 성(원산·금현)이 항복해서 그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비로소 멸망했다"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편찬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한 기사는 사료로서 문제가 있다는 공통된 입장이다. 삼국사기를 '믿을 수 없다'(전라도천년사 3권 107쪽)고 우겼다.

과거 전라도천년사 문제 토론회가 열렸을 때 필자가 편찬위 측 교수에게 "삼국사기에는 마한이 서기 9년에 망했다고 나오고 전라도천년사는 530년까지 있었다고 나오는데 어느 사료에 그렇게 나오는가"라고 물으니 '학자들끼리 그렇게 합의했다'고 답변했다. 한 마디로 역사학이 아니다.

전라도천년사 3권은 마한이 369년에 멸망했다고 썼는데 4권에서는 530년까지 존속했다고 말하고 있다. 사료에 없는 내용을 조작하려니 횡설수설하는 것이다.

전라도천년사가 이미 망한 마한을 530년까지 살리는 이유는 백제사를 지우고 야마토왜의 지배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라도가 백제강역이면 야마토왜가 지배했다고 우길 수 없다.

삼국지 등 중국 사료는 마한이 54개 소국으로 이뤄졌다고 말하고 있으니 야마토왜가 그 일정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편찬위가 마한을 369년, 혹은 530까지 존속시키려면 사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런 근거가 없으니 남는 것은 억지뿐이다.

메시지에 자신이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는 식으로 전라도천년사를 비판하면 "사이비역사학", "일본서기를 인용하면 다 식민사학이냐"는 등 비학문적 논리로 일관한다. 마한을 빙자해 전라도를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조작한 업보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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