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지속가능한 문화유산의 사례, 남원 광한루

@류성룡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입력 2026.08.23. 17:06
류성룡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류성룡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1626년 새롭게 중건된 남원 광한루가 올해로 400주년을 맞는다. 이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건축물을 보면 처음부터 특별히 잘 지어졌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건축 기술을 적용한 건물일지라도 처음 지어진 모습을 수백 년 동안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의 건축물이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남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광한루의 역사는 조선 초 황희 정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희는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1418년 파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남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황희가 남원에서 이용했던 작은 누각이 광통루(廣通樓)였다고 전해진다. 황희는 개성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장수였는데, 남원이 본향으로 고려되어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되는 등 태종의 배려를 받았는데 유배 중 직접 누각을 건립했다는 설은 의문이다.

황희가 정계에 복귀하고 영의정으로 활동하던 1434년 남원 부사 민공(閔君恭)은 광통루를 새로 지었고, 후임 부사 유지례(柳君之禮)는 단청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리에 힘썼다. 1444년 도순찰사 정인지는 이 누각을 달나라의 궁전인 광한궁에 비겨 ‘광한(廣寒)’이라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황희는 여전히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당시 광한루 주변은 넓은 공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광한루라는 이름을 통해 상상하던 달나라와 신선의 세계를 실제 경관으로 구현한 것은 16세기 후반이었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 정철과 남원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 주변의 수공간과 경관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수로를 넓히고 연못을 조성했으며, 그 안에 삼신도를 두어 신선세계를 표현하였다. 방장섬에 대나무를, 봉래섬에 백일홍을 심고 영주섬에 영주각을 두었다. 한 채의 누각이었던 광한루가 주변의 물과 섬, 식생과 건축물이 아우러진 원림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조성된 경관은 오래가지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 남원은 왜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고 8월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광한루도 소실되었다. 임시 조치 이후, 본격적인 복구는 1626년 부사 신감에 의해 이루어졌다. 7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광한루가 중건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광한루의 모습은 이때 마련되었다. 이 공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승려 장인들의 역할이다. 당시 중건의 대목수는 승려 공준(空俊)이었고 철물과 단청 등 분야에서도 승장들이 활약하였다. 이후 1701년과 1855년의 공사에서도 승려 대목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관아에 속한 누각의 중건과 수리에 승려 장인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건축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점이다.

1879년 공사에서는 수지면 말골리 고정촌에 살던 추씨 성의 대목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광한루 북쪽에 복도를 덧붙이고 출입구를 만들면서 동시에 구조를 보강하는 방안이었다. 기능을 추가하면서 건물의 안정성도 높이는 방식이었다. 광한루 누각의 현재 모습에 방점을 찍은 사람이 추대목이다.

광한루원에서 오작교는 달과 은하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신선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광한루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가 있고 직녀 베틀 아래 괴임돌(支機石)을 언급함으로써 당위성을 애써 설명하였다. 1626년 중건 이후 부사 신흠은 ‘광한루기‘에서 광한루 앞 연못을 은하수에 비유함으로써 오작교의 기능을 강조한 바 있다. 광한루, 은하 연못, 오작교는 춘향 이야기가 등장하기 전 신선세계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18세기에 오작교를 건너는 견우는 이몽룡으로 직녀는 춘향으로 바뀌었다. 중국 고대 설화 속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조선 사람들의 굳건한 정절 이야기로 변모한 것이다. 광한루원은 더 이상 중국의 신선 세계를 모방한 공간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조선의 특히 민중들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무대가 되었다.

조선 초, 고위 관료의 유배 생활과 관련되었던 작은 ‘광통루’는 이후에 지방관들의 지속적인 관리 속에서 귀중한 누각으로 자리 잡았고, 마침내 달나라의 궁전을 뜻하는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시 백여 년이 지나며 누각 주변에 연못과 섬, 정자와 식생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원림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으로 소실된 뒤에 지방관과 장인들은 힘을 합쳐 신선세계를 복구하였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중국 고대 설화의 신선들이 아닌 춘향과 이몽룡이라는 조선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과 판소리의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광한루의 역사는 문화유산의 지속가능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건축과 원림은 물리적·물질적 완성도만으로 수백 년의 생명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장소를 보존하고 고쳐 쓰며, 새로운 이야기와 문학적·예술적 상상력을 덧붙일 때 비로소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 된다는 점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으로 잘 알려진 치옹(痴翁) 윤오영은 ‘광한루기(廣寒樓記)’에서 춘향의 사당과 탐관오리들의 송덕비가 한 원림 안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아이러니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전설의 화상은 실물의 초상보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 광한루가 400년을 살아남은 이유를 이보다 잘 설명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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