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 29일은 독재에서 민주로 가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날 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뛰어다녔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환갑을 넘어가고 있다. 무등산이 보는 위치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이듯이, 6월 29일 그날의 감격, 그날의 체험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오늘처럼 좋은 날을 기뻐하며 그날 서울 시민들은 커피를 공짜로 마셨다. 그날은 사돈네 팔촌까지 뒤집고 다니면서 나의 가정을 파괴한 경찰로부터 자유로워진 ‘수배 해제’의 날이었다. 지하에서 지상에 올라온 나는 맨 먼저 어머님을 찾았다. 오랜만에 아들과 부인 어머니 모두가 모였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어머니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보았다.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던 전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6.29 선언은 연금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때 안타깝게도 한 명의 젊은이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한열 군이 7월 5일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나는 요즈음 K-민주주의에 대해 사색한다. 한국의 민주변혁은 ‘혁명운동의 교과서’에 쓰인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K-민주주의의 특질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혁명운동이 아니라 저항운동이었고, 둘은 폭력투쟁이 아니라 평화투쟁이었으며 셋은 노동자계급이 아닌 청년학생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감옥을 함락하였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그 어떤 공격적인 무력행동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저 체포되고, 구속되기만 하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속의 행렬이 민주화운동의 특징이었다.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노래를 부르며 그저 끌려가기만 했다. 완강한 저항, 이것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첫번째 특질이다.
프랑스대혁명은 혁명의 완수를 위해 유럽전쟁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는 총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투경찰이 고약한 최루탄을 남발하였으나 우리가 던진 것은 고작 화염병이었다. 우리가 뿌린 것은 유인물이었고, 우리가 앞세운 것은 풍물패였다. 칼 마르크스는 폭력혁명의 불가피성을 주장하였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주변혁으로 가는 평화의 길’을 개척하였다.
1970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충격적 사건이었다. 1986년 즈음, 대학생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는 이른바 ‘위장취업자’가 줄을 이었다. 1만여 명이 되었다. 나 역시 ‘위장취업’을 선동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공장에 들어가 하루 12시간씩 일하였다. 돌이켜 보니 K-민주주의의 주도자는 청년 학생이었다.
그래서다. 나는 지난 6월 4일 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책의 부제를 ‘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이라고 붙였다. ‘K-민주의 새벽을 연 사람들은 누군가? 1972년 ‘함성’지를 뿌린 시인, 해남 촌놈 김남주요, 1973년 서울문리대 시위를 주도한, 송정리 촌놈 나병식이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호남책, 강진 촌놈 윤한봉이다. 모두가 전남광주 청년이었다.
판사의 사형 선고 앞에서 “영광입니다.”며 감사를 올린 김병곤이 있었기에, 자신의 배를 가르며 독재체제에 항거한 김상진이 있었기에, 감옥에 가는 것을 생의 영광으로 알고 체포, 고문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 학생들이 있었기에 마침내 박정희 유신독재의 철옹성이 무너졌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 경성으로, 평양으로, 함흥으로, 북간도로 퍼져간 거국적 독립운동이었다. 그래서 ‘제2의 3.1운동’이라고 부른다. 1960년 4.19학생혁명도 1970년대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도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부터 시작하는 청년학생운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광주 시민들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의 이름을 모른다. 민주의 성지, 독립의 성지 광주 시민들이 말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하다 4년의 옥살이를 한 사람의 이름은 장재성이다. 그런데 장재성 선생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장재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이기홍 선생, 정해두 선생, 윤가현 선생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퇴학을 당한 광주고보생 300인 중에서 200여 인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문재인 정부도 외면했고, 이재명 정부도 외면하고 있다.
오늘 7월 5일은, 1950년 헌병에게 붙들려 양산동 장고봉 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한 독립운동가 장재성 선생의 죽음을 기리는 제삿날이다. 해마다 7월 5일이 오면 나는 죄인이 된다. 가슴이 무겁다. 어째야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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