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한 갑자를 돌고, 정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정(停)’은 일을 그치고 정자에 앉아 쉬는 모양이다. 휴직이나 정년이 다 쉬는 시간이지만, 후자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렇게 꿈꾸었던 온통 내 것의 시간들이, 마주 대하고 보니 낯설다. 밤이 없는 백야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시간들, 줄이 끊어진 가오리연처럼 흐느적거리며 정처 없이 흘러간다. 퇴직하고 무슨 무슨 위원으로 위촉되어 그 가느다란 전관예우의 전화벨 소리마저 울리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서 벗어난 들의 ‘나’와 마주한다. ‘나’는 늦잠을 자고, 아점을 먹고, 주식 등락을 들여다보다가, 동네 뒷산 한번 다녀와서, 저녁에 술을 곁들여 혼자 불콰하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뒤적거려 영화를 보다가, 오늘 다 못 보면 또 내일도 빨간 날이라, 슬며시 잠든다.
이튿날 새벽 아, 이 무슨 허송세월인가, 손에서 책을 놓은 것이 언제였던가, 퍼뜩 깨달은 자괴가 등을 떠민다. 그래서 간다, 백화난만한 이 아름다운 5월에, 주섬주섬 가방 싸 들고 도서관에 간다.
여러 날 다니다 보면, 아침 몇 시에 가야 창가 볕 잘 드는 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슬슬 고정석이 생긴다. 그동안 읽다 말다 밀쳐두었던 불경 니까야, 장자, 도스토예프스키, 그런 책들을 하나씩 꺼내 읽기 시작하는데 책장이 잘 안 넘어간다. 눈은 쉬 침침하고 집중력은 떨어지고, 이 어려운 책 읽어서 어디에 풀어 먹을 것인가, 그런 생각도 든다. 고전을 읽다가 막히면, 나는 스스로 돌파하는 자경문 한 문장을 갖고 있으니,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는 것이다. 나는 읽지도 못하는가, 이 대목을 되새기면서 억지로 몇 장 넘긴다. 요새는 만화책을 본다. 대만 만화작가 채지충의 ‘중국 고전’이나, ‘서울대 선정 인문 고전 만화 50선’, 그렇게 술술 넘어가는 만화책들이 좋다.
도서관에는 5월이 여태 겨울인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 갈 곳 없어 온 사람들도 있고, 5월 중간고사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고,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공시생들, 자격증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흐르는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꼭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그 의자에는 대개 겨울 잠바가 걸쳐져 있는데, 새벽 걸음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혼자 먹는다. 그 밥은 허기를 채워주는 것 말고, 참 묘한 무엇을 하나 더 가져다준다. 그것은 외로움이나 좀 가라앉는 감정 같은 것인데, 처음에는 뒷맛이 씁쓸하다가도, 어느덧 익숙해지다 보면, 오히려 그런 감정들이 소소한 위안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가 그친 이튿날 아침, 도서관 뜰을 걸으면서 나뭇잎에 남아있던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 위로 떨어졌을 때, ‘아! 어제 내린 비를 오늘 맞았네!’하고 시와 비슷한 문장이 터져 나오는 기쁨도 있다.
봉급 생활을 할 때도 오후 4시가 지나면, 막걸리 생각이 솔솔 난다. 곧 해가 져 황혼이 찾아올 것이고, 퇴근길에 한잔하는 것이 하루 노동에 대한 보상 같기도 해서 그렇다. 저녁과 술은 잘 어울린다. 약속이 있으면 가서 한잔하는 것이고, 약속이 없으면 ‘번개’라는 이름으로 수소문해보는 시간이 그쯤이다. 번개에 대한 타진이 직장 다닐 때는 별일 아니지만, 혼자가 되어서는 무척 망설여지는 일이다. 좀 조바심이 나면서 막걸리 한 잔 나눌 누가 없을까 하고 사람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다들 바쁠 것인데, 좀 낫낫한 누가 없을까? 여러 얼굴이 지나가고, 두 사람 정도를 점찍는다. ‘별일 없는가?’하고 문자를 보내는데 그것이 나로서는 상당한 용기를 내는 일이고, 사실은 구조요청이다.
갑자기 묻는 것이라, 선약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런 경우는 좀 낙심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이때 경우의 수는 선약이 있는 경우, 선약이 없는 경우, 이렇게 둘이지만, 또 하나가 선약이 있는데 취소해주는 경우다. 나는 허탕 치고 혼자 술을 마신 경우가 별로 없었다. 지금은 공기업에 다니는 후배 박 아무개가 있는데, ‘끝나고 봅시다’ 이렇게 답장이 온다. 그는 늘 선약이 없다. 그때부터 막걸리 집에 가기까지 기다리는 3시간은 술을 마시며 주점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더 행복하다. 선약이 두 번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없다는 것은 있는 약속을 취소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어디에 앉아 문자를 보내는지 그가 안다. 내가 문자를 보내는 것이 용기를 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나를 낙담시키지 않으려고 선약을 미루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그러니까 작은 선술집에서 둘이 막걸리를 한잔하는 것은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 두 개의 큰마음이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길을 걸으면 교회 담 너머로 장미꽃이 고개를 내밀고, 찔레꽃은 하얗게 웃는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는 이 아름다운 오월에, 느낀다. 도서관에서 제일 버티기 힘든 계절이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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