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하늘로 날아가는 하얀 시간들

@이광이 작가 입력 2026.01.11. 18:02
이광이 작가
이광이 작가

정현숙과 이에리사가 유고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던 해가 1973년이다.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첫 금메달이었다. 셰이크핸드의 정현숙은 수비형, 펜홀더 이에리사는 공격형으로 둘은 절묘한 조화를 이뤄 세계 최강 중공과 일본을 차례로 꺾었다. 가난한 나라의 기뻐할 만한 일도 없던 시절, 영화관에서 틀어주던 대한뉴스에는 맨날 박정희만 나오던 시절, 국민은 열광했다. 두 사람이 탄 오픈카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다. 지금도 귀에 익숙한 아나운서의 멘트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 '사라예보의 기적' 이후 광주에도 탁구 바람이 불었다.

내가 탁구채를 처음 잡은 것이 그즈음 아니었나 싶다. 친구들과 동네 탁구장에 몰려가 무작정 탁구를 쳤다. 하루는 선친이 나를 불러 이르기를, "평생 동네 바둑을 둬도 5급을 넘지 못하는데 중학생을 1년 가르치면 3급을 둔다"면서 내 손을 잡고 탁구장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관장에게 기초 교습을 받도록 등록해 주셨다. 스매싱과 커트와 드라이브까지 석 달 정도 레슨을 받지 않았나 싶다.

50대에 이르러 일도 많고 술자리도 많고 하여 체력이 축축 처지는 것을 느꼈다. 운동해야지, 하면서 뭘 할까 고민했다. 등산 달리기 헬스 수영, 그런 것은 혼자 해야 하는 고독한 운동이라 얼마 못 가 그만둘 것 같다. 땀을 흘리면서 게임도 하는 그런 것이 오래간다. 구기종목이 그렇다.

구기종목은 크게 네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테니스 배구 배드민턴 탁구 등은 네트가 있고, 농구 축구 핸드볼 하키 등은 네트가 없다. 나이 들어 시작할 때는 네트 운동이 좋다. 네트로 진영이 나뉘어 상대방과 몸을 부딪치지 않기 때문에 부상이 적다. 네트 운동은 신사운동이라 해서 유니폼에 카라가 있고, 비네트 운동은 런닝셔츠처럼 유니폼에 카라가 없다.

나는 탁구를 다시 시작했다. 구기종목은 입문이 어렵다. 라켓을 처음 잡은 사람이 복식 게임에 끼려면 2년은 걸린다.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고 끼워주지도 않는 뻘쭘한 세월, 그것을 견뎌내야 놀이에 참여한다. 은퇴 이후에 처음 체육관을 찾은 사람들은 십중팔구 도중 작파하고 만다. 그것이 하수의 운명이다. 늦어도 50대 중반에는 시작해야 인내의 강을 건널 수 있다.

내가 10대 때 레슨 석 달 받아 둔 것이 이렇게 요긴할 줄은 몰랐다. 코치가 "전에 치셨지요?"라고 물어볼 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나는 게임에 합류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을 때 내 유니폼에서 풍기는 악취를 나는 잊지 못한다. 아, 술과 담배와 삼겹살 지방으로 찌든, 내 몸이 이 정도였구나, 그 악취 덕분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운동했다. 냄새는 석 달로 접어들자 점점 사라졌다.

경기장 면적이 복식 기준으로 테니스(261㎡)가 배드민턴(82㎡)의 3배다. 또 배드민턴은 탁구의 활동반경보다 2배는 넓다. 생활체육을 하다 보면 탁구가 배드민턴보다 덜 힘들다. 배드민턴은 구청장배 같은 대회에서 40대 50대 60대, 연령별로, 실력별로 나눠서 시합을 한다. 탁구는 흔히 빠른 운동으로 오해되지만, 사실 힘보다 판단의 운동에 가깝다. 공은 늘 나보다 빠르게 날아오고, 중요한 것은 세게 치는 능력이 아니라 언제 치고 언제 흘려보낼지를 아는 감각이다. 탁구는 실력을 1부~9부까지 나누고, 나이를 묻지 않는다. 20대와 60대가 맞붙는다. 젊음이 아니라 축적된 리듬이 기준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탁구 쪽에 기웃거리게 되는 이치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은 '평등', 아파트 몇 평이냐, 자식은 몇 등이냐로 따진다고 한다. 유럽의 기준은 세 가지, 스포츠 악기 외국어를 아마추어 고급 수준까지 올랐느냐가 기준이라 한다. 저 세 가지 기준이 마음에 든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 하나는 해야 하고, 홀로 고독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악기 하나는 해야 하고, 패키지 말고 자유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외국어도 하나쯤 해 두어야 하지 않은가.

사라예보의 기적 이후 50여 년이 흘러 우리는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었다. 은퇴는 일을 그만두는 생의 한 매듭이지만, 사실 잃어버린 것은 삶의 리듬이다. 가오리연 줄이 툭 끊어져 버렸을 때처럼, 통제 없이 날아가는 이 백색의 시간들, 이때 삶을 지탱하는 것은 돈보다도 리듬이다.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 돈 버느라 직장 다니느라 밀쳐 두었던, 말하자면 꿈 꾸었던 것들을 한번 시작해 보기에 얼마나 좋은 시간인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하나는 50대에는 시작해야 좋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폼나는 것 말고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도중에 작파하지 않고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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