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인류에게 선사했다. 이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권력이란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에는 공동체의 진리와 정당성 관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민회에서 그 꽃을 피웠다. 민회가 열리는 아고라에는 공동체의 운명을 가를 정치적 의제의 참과 진리성, 정당성이 특정한 일인이나 소수가 아니라 민회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의 주장과 논리가 교차하고 경쟁하면서 산출된다는 원리가 작동해 왔다. 그러한 원칙이 관철되기 위해 민회는 토론 주체들에게 진리와 정당성 발견의 동등한 권한과 자격을 부여 했다. 진리와 정당성을 향한 모든 정치적 언어는 동등한 가치의 무게를 지녀야 했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2천년이 훨씬 넘어 서구 근대에서 다시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버마스야말로 진리와 정당성에 관한 민주주의의 근대적 원칙을 입체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한 선구적 사상가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17-8세기 유럽의 근대 부르주아 공동체에 대한 역사적·철학적 접근을 통해 공론장(public sphere)와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두 개념으로 구축되는 진리와 정당성의 민주주의를 조명해 내었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필두로 여러 근대 혁명을 통해 서유럽이 실현해 내었고 다른 대륙들이 받아들여 보편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는 그 민주주의는 공론장과 여론이라는 개념이 떠받치고 있고, 거기에는 '공'(public)이라는 접두어가 포함되어 있다.
이 공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복합적이다. 우리가 공권력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그 공은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체를 뜻한다. 한편, 공공도서관과 같은 단어에서의 공은 보편적 자격의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공의 셋째 차원에 주목하는데, 진리와 정당성 창출을 향한 논쟁과 비판의 힘이다. 가령 공개 토론에서의 공은 그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과의 논쟁과 비판에 노출할 것을 요청한다. 공의 첫째와 둘째 의미는 반드시 근대적인 원리에 연결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셋째 의미는 근대 민주주의와 깊이 결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버마스는 통찰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공의 둘째 차원과 셋째 차원 위에서 근대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즉, 공동체의 집합적 문제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질 때, 그 토론의 장(공론장)에 들어오는 사람의 자격에는 제한이 없고, 의제의 진리성과 정당성은 서로의 논쟁 속에서 상호 비판을 견뎌낼 때만 그 실제적 위상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여론은 그처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그리고 평등한 토론을 거쳐 주조된 집합적 의견이다. 그렇게 볼 때 그 여론은 단 한 사람 혹은 소수의 특권체가 아니라 다수 지성의 힘으로 잉태된 정당한 진리이다.
근대 이전의 공동체에서는 다수의 사고와 비판에 노출될 수 없었던, 말하자면 금기와 터부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권위적 언어와 믿음들이 존재했다. 순수하고 고귀한 피와 불결하고 가치 없는 피가 있으며, 지배의 본성과 피지배의 본성이 구분되어 있으며, 권력은 하늘의 절대자가 내려준 신성한 실체라는 것 등이다. 그러니까 이 믿음들은 전근대 정치질서와 권력을 떠받치고 있던 궁극의 이념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말한 권력 정당성의 전통적 원리는 바로 그러한 정치적 믿음 위에서 조형되었다.
하지만 근대의 공론장은 당대의 모든 근거 없는 믿음, 합리적 인식을 거부해 온 믿음을 모두 진리와 정당성의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자 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지난 시절 전통적 권위에 의해 진리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대한 근원적 도전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부르주아 문화를 이끌어 있던 살롱과 카페가 공론장의 핵심적 장소들이었으며, 그 문화적·정치적 장소들에서 전근대의 모든 가치와 이념과 원칙들은 비판과 도전을 받아야 했고, 진리의 값을 얻지 못하고 정당성을 얻지 못하면 모두 폐기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게,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정당성과 부당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간 토론 주체들의 집단지성, 즉 여론이 바로 진리의 최종적 결정권자로 서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란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앞두고 있다. 그 역사적 숙제의 출발은 국가적 권력체를 두르고 있는 모든 비이성적인 권위와 믿음의 토대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에서 배우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그 전근대적 권위들을 걷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전근대적 의식을 마주하고 있는바, 바로 사법 권력이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진리를 실천한다고, 법의 정당성은 자신들의 내부에서 창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법 권력은 여론이라는 집단지성의 힘을 폄훼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적 근대가 아직 미완인 이유이고, 그것의 완성을 향한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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