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을 바라보는 내겐 오랜 꿈이 있었다. 40년을 독일에서 같이 산 독일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시골살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이 말을 들은 올케가 지인의 지인을 통해 창녕 우포늪 근처에 한 달 살 집을 구해줬다. 한 달 동안 집 한 채 다 쓰는 데 40만원이면 가격도 쌌지만, 유명한 우포늪 근처라니 더욱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20가구쯤 사는 작은 마을에서 한 달을 지냈다.
아름다운 우포늪은 암만 다녀도 물리지 않았다. 하늘빛 따라 변하는 물빛은, 계절따라 변화하는 수목들과 함께 매일 다른 경치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코스로 산책 다녔다. 경치만 보러 다닌 게 아니라 생태체험관, 따오기 복원센터도 견학했다. 전래동요로 알려진 따오기가 멸종되었다가 복원되는 과정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우리가 빌린 집은 옛날 기와집을 원형에 가깝게 보수한 집이었다. 외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부도 마찬가지었다. 하얀 회벽에 까만 대들보가 드러나는 천정과, 구멍이 송송 뚫린 창호지 미닫이문이 정취 있었다. 남의 집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매사에 서툴러서 생활의 속도가 느렸다.
그곳에선 모든 일이 느리게 돌아갔다. 산보 한번 다녀오고 나면, 하루 일용할 양식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일에 하루가 금방 갔다. 모기가 많아서 문단속을 부지런히 하고, 물린 곳을 치료하는 일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텃밭에 물 주려고, 빗물 받아놓은 통에서 물을 길으려면 모기 애벌레가 바글거렸다.
시댁이 시골이라는 서울내기 친구는 일부러 내려와서 시골살이의 요령을 알려주고 갔다. 부채로 모기 쫓는 방법(그냥 하염없이 훨훨 부채질을 해대다가 가끔씩 부채로 등을 탁 쳐준다.)과 실내에서 선풍기를 틀어놓으면 모기가 못 날아다녀서 덜 물린다는 팁은 시골에 사는 내내 금쪽같이 요긴했다.
방에는 가끔 거미나 지네가 들어왔다. 거미는 이로운 곤충이니 그냥 놔두고, 작은 지네는 너무 빨리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놔두고, 아주 크고 무섭게 생긴 지네는 남편이 컵과 종이를 이용해 산 채로 잡아서 밖으로 내보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휴지는 변기에 넣지 못하므로 따로 모아두었다가, 며칠에 한번씩 뒷마당 아궁이에서 태웠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가끔씩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읍내 마트에 다녀왔다. 읍내 가는 버스는 하루에 대여섯 번쯤 다녔는데 시간을 칼같이 맞춰서 운행했다. 시스템은 정확해도 일은 사람이 하는 터, 인심 좋은 기사아저씨는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도 마을에서 가까운 길가 아무데나 차를 세워주셨다.
아침에는 늘 신선한 시골 공기를 마시며 처마 밑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공기엔 농촌 특유의 거름냄새가 배어 있었는데, 적응하니 구수하게 느껴졌다. 완만한 산자락에 구름이 잠겼다 퍼지는 것을 보다가, 감나무에 까치가 후두둑 들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느리고 헐렁하게 흐르는 시간을 마당 감나무 보듯이 편안하게 바라봤다.
남편은 아침식사가 중요한 사람이다. 새로운 음식을 잘 먹는 편인데도 아침식사만큼은 커피와 빵을 반겼다. 커피는 귀촌한 동네 청년 묵이씨가 수제로 볶은 커피와 핸드드립 기구 일습을 갖다줘서 늘 맛있게 마셨다. 읍내 빵집에서 파는 빵은 너무 달아서 우리는 읍내 마트에서 토스트를 큰 봉지로 사서 냉장고에 두고 며칠씩 먹었다. 반경 200m 안에 베이커리가 몇 개나 되는 뮌헨 시내에 사는 우리는 아침에 갓구운 빵을 먹는 게 일상이었는데, 한국 시골에 와서는 눅눅해진 토스트를 굽지도 않고 잘 먹었다. 아침식사는 토스트, 삶은 달걀, 방울 토마토, 오이로 매우 소박했다.
내 평생 꼭 한번 가보리라 독일에서부터 별렸던 읍내 오일장에도 갔다. 눈요기를 실컷 하고 신기한 먹거리들을 바리바리 싸왔다. 장터 간이식당에서 독일에서 늘 먹고 싶었던 잔치국수를 사먹었다. 유명하다는 창녕 국밥은 좀 무섭게 생겨서 못 사먹었다.
읍내 쌀집에서 쌀을 사면서 간장과 된장은 어디서 파는지 물어봤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파는 게 아니라 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그래서 마트에서 팔지 않는냐고 물었더니, 공장에서 만든 건 진짜 장이 아니니 사지 말라고 했다. 그러더니 손수 만든 된장과 간장을 덜어주었다. 놀라웠다. 그런 상황에서 돈을 드리면 실례될 것 같아서 다음에 꽈배기를 사다드렸다.
우리가 살던 집에는 대문에도 현관에도 자물쇠가 없었다. 그냥 다 열어놓고 사는 삶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마을이라서 우리도 하루종일 문 열어놓고 나가 있으면서도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동네분들과 마주치면 공손히 인사하며 다녔다. 윗집 아랫집 할머니들과는 격의없이 말 섞으며 지냈다. 독일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워딩, ?식사하셨느냐', ?지금 어디 가시느냐'는 인사가 내 입에서도 술술 나왔다. 하루는 아랫집 할머니가 텃밭에서 휘리릭 부추를 훑고 있는 것을 보고, 뭐 하시는지 내 눈으로 보면서도 뭐하시느냐고 물었다. 부녀회관에 가져가서 이웃친구들이랑 같이 밥 비벼 먹을 거라는 말에 나도 따라가고 싶었다.
폭우가 지나간 후, 도로 한편에 4륜 전동스쿠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맞은 편에는 형광조끼 입은 어르신들이 일렬로 조로록 앉아서 도로변 화단을 정비하고 계셨다. 입으론 대화하고 손으론 호미질 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일당이 많지 않아도 신청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참 기발한 아이디어인 것 같다. 한국에는 참신한 노인복지 제도가 많다.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내겐 한 여름 밤의 꿈 같이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도시형 인간이기도 하거니와 언어와 공감 면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시골살이가 좀 심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쌓았다. 인생에서 남는 건 추억 뿐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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