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김장하, 그 불교적 빛깔들

@이광이 작가 입력 2025.06.15. 15:50
이광이 작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불교의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보시'는 베풂이다.

재물을 나누고, 액난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부처의 지혜를 전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무주'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이 어렵다. 상은 기억이다. '내가 보시했다, 저 사람에게 보시했다, 이것을 보시했다'는 생각이 상이다.

나는 술을 여러 번 샀는데 그놈은 맨날 얻어먹기만 하네, 하면서 은근히 술 되사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상이다.

무주상은 술을 산 뒤에 그 생각에 머무르지 않음, 가면 간 줄도 모르는 것, 주고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것이다.

보시는 채권 전표가 없는, 기본적으로 손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으므로 그저 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因)은 남는다.

"이번에 얼마 나왔어?"

"13만4천2백50원 공고되었습니다"

"다른 필요한 거 없어?"

"없습니다"

장학금을 주는 사람과 받는 학생의 문답이다.

말이 담백하고 정직하게 오고 간다.

석 달에 한 번 한약방에 찾아가면 돈을 헤아려 봉투에 넣어준다. 그리고 더 말이 없다.

등록금에 더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기숙사비 하라고 챙겨준다.

고교 입학에서 대학 졸업 때까지 내내 그랬다. 저런 문답에 문서 한 장 있을 리 없고,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돈을 주었는지 헤아렸을 리 없다.

옛 한약방 옆에서 자전거대리점을 운영하는 사람은 "30년이 넘도록 세를 올린 적이 없고, 코로나 때는 오히려 깎아 주었다"고 했다. 지역신문을 창간하는 일, 연극 극단을 창립하는 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 일, 가정폭력 피해 여성 재활시설을 만드는 일, 그런 일들이 그냥 될 리 만무하건만, 독지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눈보라 치는 어느 저녁, 일본의 백운선사가 출타했다 절에 돌아가는 길이다. 일주문 앞에 걸인이 앉아있다. 얇은 옷에 가만두면 얼어 죽을 모양이다. 스님, 발길을 멈추고 자기 누비옷을 벗어준다. 걸인은 당연한 듯 옷을 받아 입고 말이 없다. 스님이 "이보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는가?" 하니, "줬으면 그만이지. 내가 옷을 입어주었으니 고맙다는 말은 스님이 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응수가 걸작이다. 여기서 선사, 한 깨달음을 얻었고, 걸인은 문수보살이었다'는 이야기.

누비옷을 벗어주는 것이 '보시'다. 그리고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에 퍼뜩 깨달음이 '무주상'이다. 이 이야기는 버전이 여럿 있다.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도 약간 달리 나온다. 이 책 제목 '줬으면 그만이지'(김주완)가 걸인의 말에서 따온 것인데, '무주상보시'를 이토록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어 놓았다.

"저는 고교 2학년부터 대학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문형배 당시 부산고법 부장판사가 목이 메어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제가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진주 시민사회가 마련한 김장하 선생 깜짝 생일잔치. 이제는 유명해진 이 이야기가 나온다. 장학금을 주는 행위는 '보시'이나, 훗날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라는 말을 만나면서 '무주상'이 된다. '줬으면 그만이지'가 언(言)에서 행(行)으로 건너가는 대목이다. 지난 4월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이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는 대목은, 그냥 우연이 아니라, 김장하가 뿌린 인(因)의 씨앗이 우리에게 연(緣)으로 회향(回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불교의 말들은 앞에 '무(無)'자가 많이 붙는다. 무소유 무욕 무심 무명 무위 무아 무주상, 그리고 무등(無等)도 그렇다. 어느 정도 높아야 일등, 이등, 하는 것이지, 까마득히 높은 것은 등을 매길 수 없는 '무등'이다. '무'자 언어들을 하나로 꿰는 최상이 '무아(無我)'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 아닌 것이 없다'는 원시 불경 '숫타니파타'의 경구.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아'를 쫙 펼쳐 보여주는 경지가 '무주상'이다. 이 '무'자 돌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훌륭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을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음'에 있다는 가르침을 김장하는 보여준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직도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앞으로 남은 세월은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생일잔치에서 김장하 선생이 한 인사말, 이토록 간결하다.

1963년 한약방을 열어 2022년 닫기까지, 60년의 긴 여정을 마치고 김장하 선생,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인생은 다리이니, 건너는 가되 그 위에 집 짓지는 말라'는 어느 랍비의 말이, '무주상'으로 일관한 그의 삶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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