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선거와 민의-독일에서

@임혜지 작가 입력 2025.05.06. 13:58
임혜지 재독 건축사학자

1998년 독일 총선은 긴 터널 끝의 출구였다.

헬무트 콜 총리가 이끄는 보수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의 16년 장기집권은 통일 이후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을 극복하지 못했다.

침체와 정체가 이어지며 콜 총리를 풍자하는 개그만 넘쳐났다.

정권 교체의 열망은 컸지만, 기독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다수당이었다.

우리 부부는 투표 전날까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한국 국적자로 독일에서 선거권이 없었기에 독일인인 남편은 늘 내 의견을 물어 '우리의 한표'를 행사하곤 했다.

우리는 한결같이 녹색당을 지지했지만, 그때만큼은 예외였다. 남편이 먼저 예외를 제안했다.

"이번에는 사회민주당(SPD, 중도 좌파)에 표를 몰아줄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지역구 투표 뿐 아니라 정당 투표에서도 사회민주당을 찍는 게 정권 교체를 위해 안전하지 않을까? 정당 투표에서 녹색당이 또 5%를 넘지 못하면 그 표는 버리는 셈이라 불안해."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런데 나는 사회민주당 대표 슈뢰더가 마음에 안 들어. 사회주의를 말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따르잖아."

"그래? 그럼 그런 정당은 뽑지 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총리가 되면 우리 이상에 맞는 정치를 하겠어?"

"(남편 버럭) 그럼 정권 교체는?"

"정권이 바뀌어도 만족하지 못할 거라면, 그런 교체가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는 녹색당 이상이 우리 이상과 맞기 때문에, 사표를 무릅쓰고 지지해왔어. 나무를 키우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히 물을 줘야 하지 않나? 선거는 민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니까."

남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투표하고 왔다.

그날 우리는 역사적인 경험을 했다.

역대 최고 투표율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사상 처음으로 기독민주당을 꺾었고, 녹색당도 6.7%의 득표율로 의회에 진입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녹색당은 여러 부처의 장관을 배출했고, 현실 정치와 경제 성장 속에서도 환경·평화·인권을 추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해 우리는 투표 한 번으로 우리의 이상이 현실이 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 모든 것은 독일의 독특한 혼합형 비례대표제(MMP)와 다당제 정치문화 덕분이었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에게 1표, 정당에 1표를 행사하고, 최종적으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비례적으로 배분된다.

즉, 민의에 충실하게 권력이 배분된다.

근소한 차이로도 권력을 독점하는 승자독식 구조가 아니기에, 한 정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여러 정당이 손잡고 연립정부를 꾸려 협치하는 수밖에 없다. 그날 남편은 지역구 투표는 사회민주당을, 정당 투표는 녹색당을 찍었다.

집권 경험이 있는 큰 정당이 우리의 이상을 대변하는 소수 정당과 함께 나라살림을 꾸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2025년 2월, 독일 조기총선을 앞두고 우리 부부는 또 한 번 머리를 맞댔다. 그새 30대 풋풋한 청년에서 60대 은퇴자가 된 남편은 노인성 심술을 부렸다.

"(남편 버럭) 이젠 녹색당 안 찍어. 환경은 뒷전이고, 경제성장에만 매달리는 기성 정당이 다 됐잖아."

"어머? 정권을 잡았으면 대화와 타협을 해야 하니까 그렇지. 어떻게 국민 다수와 척지면서 협치를 해? 그래도 다른 당보단 환경정책 많이 했잖아. 친환경 에너지 기술 쌓아서 탈원전도 과감히 시도했고."

"(남편 삿대질) 탈원전은 보수정권 때 메르켈 총리가 한 거지, 녹색당은 무슨?"

"글쎄 메르켈이 왜 탈원전을 했겠느냐고?"

민의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녹색당은 오랫동안 원자력의 위험성과 대안을 꾸준히 제기해왔고, 후쿠시마 사고 후 그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2011년, 메르켈 총리가 탈원전을 선언한 직후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urttemberg) 주선거는 그 민의를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보수 텃밭인 이 지방에서 기독민주당은 1위를 했지만 과반을 넘지 못했고, 2위 녹색당과 3위 사회민주당이 손잡고 과반을 넘기며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독일 최초의 녹색당 출신 주총리가 탄생했다.

그런데 이 주가 어떤 주인가?

독일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고, 부유하며, 제조업과 혁신 산업의 중심지다. 보수적 실용주의로 단단히 무장한 이들이 갑자기 낭만적으로 변해서 녹색당을 찍었을 리는 없다.

계산기를 두드려 본 끝에, 녹색당 정책이 더 미래지향적이고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실리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크레치만(Kretschmann) 주총리는 온건하고 실용적인 정치인으로, 전통적인 보수 유권자에게도 안정된 리더십을 보여줬다.

녹색당은 더 이상 급진적 환경운동 집단이 아니라,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 독일 총선에서도 녹색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했고, 올해 초까지 집권했다.

초기에는 '미친 소리' 취급받던 녹색당의 환경정책이 지금은 독일의 평범한 일상이 됐다. 민의의 흐름을 읽은 거대 정당들이 녹색 정책을 받아들였고, 탈원전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다른 정당이 녹색당의 환경정책을 가로챘다지만 그럼 어떤가? 독일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면야.

"다 똑같아져서 찍을 당이 없다고 화내면서 가더니 찍긴 찍었어? 기권했어?"

"응, 내 이상을 조금 더 반영하는 다른 소수당을 찍었어. 민의를 보여주려고."

우리 부부가 해온 수많은 대화가, 어느새 서로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구나. 부부싸움 할 때는 늘 승자독식이라 느꼈는데, 이제 보니 우리도 협치를 해왔네. 더불어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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