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그녀의 이름은 축복

@신혜진 소설가 입력 2025.02.16. 16:43
신혜진 소설가

인간의 만남에는 이유가 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이는 귀인이다. 한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기꾼과 인종차별주의자 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뒤 인연 맺는 일이 두려워졌다. 한국에서 살 때는 꽤나 발 넓은 축에 속했는데 이제는 친구도 조심스럽게 사귀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블레싱을 만난 건 반은 우연이고, 반은 개인적 불행 덕분이다. '불행의 덕을 본다'는 건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이다. 과정을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넘어가기로 하자. 나는 그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고 그녀는 나에게 뜨개질을 배운다. 무엇보다 서로 걱정하며 격려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녀의 이름은 블레싱이다. 맞다, 영어로 Blessing, 한국어로 번역하면 축복… 처음 만났을 때 블레싱이 본명이냐고 물었더니 한국인이 민증 까듯 고등학교 학생증을 보여준다. 우리 나이 차이가 '조금' 난다고 말하자 나보고 "33살이냐"고 묻는다. "33년 차이"라고 하니까 큰 눈을 끔벅이며 산수가 안 되는 표정이다. 우리가 외국인 얼굴을 보고 나이를 구별하기 어려워하듯 그들도 동양인 나이를 잘 맞히지 못한다. 대체로 동양인의 체구가 작고 콧대도 낮아서인지 제 나이보다 어리게 보는 편이다. 아무튼 Blessing 본명이 맞다. 프랑스인으로서는 매우 드문 이름이고 영어로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쯤 맥도날드에서 만나 필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뜨개질을 조금 하고 3초쯤 포옹을 한 후 헤어진다. 다음 번 만날 약속은 하지 않는다. 둘 중 생각나는 사람이 문자를 하면 자연스럽게 약속이 잡힌다.

"혜진, 잘 지내? 소식이 궁금해. 아직 기침 많이 나? 엄마가 생강차를 끓여서 마셔보래. 근데 맛은 죽음이야."

"안녕, 블레싱? 난 잘 지냈어. 넌 어땠어? 네가 공부하는데 방해될까 봐 문자 안 했어."

"기말고사 아주 잘 봤어. 월요일 오후에 만날까?"

"시험 잘 봤구나! 너무 잘했다! 잘 됐어!"

블레싱이 대입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한국식 입시 스타일에 익숙한 나로서는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웬일인지 그녀의 어머니도 딸이 나와 만나는 걸 권하는 눈치였다. 정확히 이유는 알 수 없다.

지난주에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알베르 까뮈가 영화배우처럼 잘생겼다고 대화한 기억이 나서 지난 성탄절에 나는 그녀에게 소설책 '이방인'을 선물했었다. 그녀는 큰 공책 한가득 그림과 화살표를 그려가며 나에게 차이와 차별, 몰이해와 무신경에 대해 설명했다. 삼십 년 전 한국어로 읽은 소설이라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그녀는 작품을 읽은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책 여러 곳에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한불사전에서 '부조리'라는 단어를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평론가들은 이방인을 '부조리'라는 키워드로 해석한다고 말하자, 블레싱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며 노트에 적었다. 아마 한동안 우리는 '부조리'라는 표현을 종종 쓰게 될 것이다.

프랑스 TV에서 한국의 계엄령에 대해 들었다면서 그녀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너의 대통령은 정신병에 걸렸어?"

"아니야. 그는 멀쩡해. 나의 대통령은 지독한 우파인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두려워해."

"다른 생각?"

"한국에는 금지된 생각이 있어. 공산주의를 따르면 안 되고, 북한을 좋게 말해서도 안돼."

"생각을 금지한다고?"

"응, 사실이야. 금지된 생각을 하고 말하고 글을 쓰면 감옥에 가. 지금은 조금 나아졌는데 나의 대통령은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가 봐."

"너는 공산주의자야?"

"아니, 그건 아니고…"

블레싱은 '금지된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반도 남북이 분단된 상태여서 그렇다고 설명했는데 내 프랑스어가 아주 유창하더라도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나도 나의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블레싱이 공책에 프랑스어 단어 하나를 적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독재'였다. 이후 한국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그녀는 나에게 염려 섞인 문자를 보내곤 했다. 그녀의 걱정이 고마웠다.

"네 나라의 상황은 부조리해."

한국의 상황은 부조리하지만 마침내 대통령이 재판을 받게 되어 '다행'이라고 블레싱이 덧붙였다. '오징어 게임'은 봤어도 한국은 잘 모른다고 했었는데 지금 그녀는 정말 한국을 걱정한다. 그녀의 이름처럼 참으로 귀한, 축복 같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번 과외비를 지불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는 "이미 많이 받았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뜨개질 방법을 가르쳐주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준 게 전부다. 교정기를 착용한 그녀가 발음하는 프랑스어가 듣기 좋아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중간에 끊지 않고 음악처럼 듣는다.

행운과 불행이 길항하다 그 끝에 어떤 만남이 결과처럼 남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인간의 만남에는 이유가 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이는 귀인이다.

슬퍼요
13
후속기사 원해요
5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18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