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할매들은 울지 않는다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3.10.29. 17:34

잘나가는 후배 시인이 있다. 시를 잘 쓰는 것은 물론이요,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아 누구에게나 인기도 많다. 사업에도 재주가 있어 일찌감치 큰돈을 벌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그는 간혹 내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한다.

"누님, 외로워. 어떻게 하지?"

근원적인 외로움을 어쩌지 못하는 천생 시인일 테지만 때로 나는 모든 것 다 가진 그의 하소연이 당황스럽다.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다. 서울 사는 지인들은 곧잘 전화를 해서 자기가 처한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을, 때로는 우울을 털어놓는다. 약을 복용하는 친구도 몇 있다. 객관적으로 살기가 힘들어서는 아니다. 주관적으로야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런데 이상도 하지. 시골 할매들은 좀처럼 넋두리를 하는 법이 없다. 살기 힘들다 우는 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이 서울 사는 내 친구들보다 훨씬 열악하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다. 누구의 삶인들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울지 않는다.

시골 살면서 할매들 만날 일이 잦다. 식당에만 가도 다 칠십은 족히 넘은 할매들이 서빙을 하고 요리를 한다. 가끔은 할매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하고, 글 때문에 인터뷰도 한다. 만날 때마다 할매들은 여러모로 감동과 충격을 준다. 내가 글 쓰는 사람인 걸 알면 십중팔구 할매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 소설로 쓸라고? 한 권으로는 모지랄 것인디? 아매 열 권도 모지랄 것이요."

열 권 이상 써야 할 만큼 죽도록 고생을 하며 살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하소연은 하지 않는다. 아주 당당하게, 심지어 유쾌하게 나라면 살아냈을까 싶은 정도의 인생을 썰로 풀기 시작한다. 그 삶들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내 엄마에 대한 생각마저 바꿔놓았다.

내 엄마는 열일곱에 엄마를 잃었다. 그게 철천지 한이었다. 지금도 노상 너무 어려 엄마를 보내서 다른 엄마만 봐도 눈물이 났다고 눈물 바람이다. 그런데 내가 인터뷰한 한 할매는 일곱 살 되던 해 봄, 일주일 상관에 부모와 조부모, 언니 오빠를 한꺼번에 다 잃었다. 세 살짜리 여동생과 함께 남겨진 할매는 작은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농삿일하며 자랐다. 일꾼 야무지게 부려먹을 요량으로 시집도 보내주지 않던 작은엄마는 노처녀 소리 들을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혼처를 물어왔다. 새옷은커녕 신발 한 짝 해주지 않았다. 다 닳은 짚신을 신었다가 그만 신발이 벗겨져 맨발로 시집을 갔다. 신발 한 짝 없이 시집온 년이라고, 시어머니는 평생 구박을 했다. 그렇게 살아온 할매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워째, 쓸만 허겄소?"

할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와 괜히 엄마에게 퉁박을 주었다. 할매 얘기 듣고 보니 열일곱에 엄마 잃은 게 천추의 한이라는 내 엄마의 슬픔 따위는 감히 댈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할매는 빨갱이 오빠가 있다는 이유로 깡패 시동생에게 노상 맞고 살았다.

"와따, 맞다봉게 고것도 다 요령이 생기드랑게. 일단 한 대 맞으면 바로 자빠져야 써. 땅바닥에 팍 쓰러짐시로 무르팍을 턱쪼가리 밑에 빠싹 붙이고 두 팔로 대가리만 가리먼 죽든 안 합디다."

죽든 안 하더란 말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러니까 할매는 죽지 않을 정도로 맞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도 할매는 울지 않는다. 아흔 넘은 나이에 공공근로를 하며 어쩌다 찾아오는 손자들 용돈 주는 재미로 산다. 시골 내려와 산 지 십 년 지난 지금에야 알았다. 자기 앞에 닥친 고통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온 할매들은 슬픔 따위에 굴복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이란 전투에서 살아남은 승리자니까. 아무리 고달팠어도 승리했으므로 할매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그렇듯 과거의 고통까지 과장해 썰을 풀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할매들을 생각한다. 할매들에 비하면 편히 살아온 덕에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나 더 젊은 세대는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면서. 할매들처럼 고통이나 슬픔에 정복당하지 않는 승리자가 되겠다 다짐하면서.?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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