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 한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다. 선배의 고향마을에 한 망나니가 있었다. 도박으로 집안 재산 말아먹고, 걸핏하면 술에 취해 쌈박질이나 하고, 자식이 아니라 원수 같은 사람이었다. 집안사람이고 동네 사람이고 술에 취해 난동 부리는 그를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며 한 마씩 했다.
"저 저 베락 맞아 죽을 놈!"
어느 날, 그는 정말 벼락을 맞고 세상을 떴다. 그날 이후 그 마을에서 '베락 맞아 죽을 놈'은 금기어가 됐다. 친구들끼리 너 그러다 벼락 맞는다, 농담을 주고받는데 지나가던 선배가 말이 씨가 된다며 들려준 이야기다.
나는 요즘 댓글을 잘 보지 않는다.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댓글창에 언젠가부터 저마다의 원초적인 분노와 욕설이 난무한다. 정신질환자가 살인을 저지르면 '정신병자 새끼들은 다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혐오의 댓글이 수천 개 달리기 일쑤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은 채 성추행을 당한 여성에게는 '만지라고 벗은 거 아니냐'는, 피해자를 짓밟는 공격적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근거에 의하지 않고 파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뱉는 말을 우리는 흔히 막말이라 한다. 분노와 갈등이 없던 시대는 없었다. 그러나 막말이 이토록 난무한 시대는 없었던 듯하다. 무엇이 막말을 양산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치열한 경쟁 탓에 각자도생하기도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의 분노나 일탈 따위에 관심 가질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경쟁에서 도태된 그들이 장차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도 지금 당장은 모두들 관심이 없다.
둘째로는 우리가 유례없는 익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서 우리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같은 아파트에서 몇 년이나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또한 서울 살 때는 그랬다. 윗집에 할머니가 산다는 것은 알았다. 홀로 사는 할머니가 외롭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외로운 할머니가 자꾸 말을 시킬까 봐 윗집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문을 나서곤 했다. 서울 살 때 나에게 친구 몇을 제외한 타인이란 가급적 부딪치고 싶지 않은,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아는 사람에게는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관대하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서울은 좁은 도시 아닌가. 과밀한 지하철이나 복잡한 어떤 공간에서 부딪치는 타인이란 대개 짜증유발자일 뿐이다. 서울만 익명의 도시인 게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더 거대하고 완벽한 익명의 세계다. 그곳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자신의 욕망이든 분노든 마음껏 배출할 수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나인 줄 모를 테니까 면전이라면 차마 하지 못했을 어떠한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도 그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곳은 야만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사람이나 생명 있는 존재만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말에도 에너지가 있다. 좋은 말은 좋은 말을 불러오고, 나쁜 말은 나쁜 말을 불러온다. 말도 글도 사람을 분열시키고 혐오하게 해서는 안 된다. 히틀러의 말이 그러했다. 그는 독일이 처한 여러 문제를 유대인의 탓으로 몰아 유대인 혐오를 부추겼고, 그 결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량학살이 발생했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에게 겨누는 말의 칼이 히틀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진보진영에서만이라도 제발 혐오의 말을 멈추면 좋겠다. 적어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는 자가 진보일 테니. 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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