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한 청년의 아름다운 용기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3.04.02. 13:58

"일제 말기 군수는 공출, 정신대 차출 등을 맡은 일선 행정의 최고책임자였는데, 군수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군수가 되기를 희망해 군수가 됐다면 이는 친일파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였거나 그들의 정신을 기리려는 후세가 아니다. 바로 그 군수가 되기를 희망해 군수가 되었던 고 이항녕 선생이다. 불과 스물넷의 나이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창녕군수와 하동군수를 지냈던 이항녕은 살아생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 앞에 사과했다. 군수를 지낸 지 50년이 지난 1991년에는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의 초청으로 하동을 찾아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했던 저를 너그럽게 맞아주신 하동군민들께 진심으로 사죄'하며 '적어도 고등관 이상 관리는 친일파'라고, 다시 한번 자신의 행적을 사과하고 반성했다. 2005년에는 KBS가 방영한 8·15 특집 프로그램에 아흔의 노구를 끌고 직접 나와 또다시 사죄했다. 타고난 천재로 일제강점기에 승승장구했던 이항녕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가 군수로 있던 창녕군과 하동군의 공출과 정신대 차출 실적은 전국에서 꼴찌에 가까웠는데도 말이다.

다음의 고백은 어떠한가?

"12월 8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 민족의 대위기를 느끼고 일부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줌이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희생되기를 스스로 결심했다."

1949년 2월 7일 세검정 은신처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된 춘원 이광수가 마포형무소에서 2주일 이상 밤을 새워 썼다는 '나의 고백' 중 일부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한 희생이었다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자기반성이 없다. 자기변명이 있을 뿐이다. 반성과 사죄는 진실해야 하고, 거기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그래서 이항녕은 죽기 직전까지 사죄하고 또 사죄했던 것이다.

요 며칠 전우원 씨의 행적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5·18 학살 책임자 전두환의 손자다. 학살자의 손자로 태어나기를 선택했을 리 만무한 그는 전씨 일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이 빼돌린 비자금으로 가능했음을 고백하더니 급기야 마약하는 모습까지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마약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고 법적 처벌을 받기 위해서란다. 누가 봐도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무엇이 그를 아프게 했는지는 모른다. 어떤 사람은 승계구도에서 밀려났기 때문일 거라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내막이 무엇이든 그의 고백은 5·18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의 측근에서 최초로 나온, 무려 33년 만에 3대의 입을 통해 나온 최초의 인정이자 반성이다.

마약으로 경찰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맨 처음 광주를 찾았다. 그리고 긴장하여 어색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게 광주를 찾아 죄송하다. 진심으로 사죄한다. 한 번이라도 더 사죄했어야 하는데…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가족이 나서서 5·18의 완벽한 진실을 공개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자신이 입 다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임을. 가족들도 나서지 않을 것이고, 세상도 가족을 처벌할 수 없을 것임을. 그럼에도 그는 인정하고 사죄했다. 무릇 양심 있는 사람의 당연한 행위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찔려 괴로운 것, 이게 양심이다.

광주 시민들은 학살 당사자도 아닌, 손자의 사죄를, 고맙게 인정했다. 그의 사죄로 인해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인정과 사죄 한마디면 족했던 것이다. 당사자도 아닌 손자의 사죄에 눈시울을 붉히는 광주 시민들을 보며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우리는 왜 반성하고 사죄해야 하는가? 광주경찰서 경부를 지냈던 친일파 한용수의 후손 한진규 선생의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많이 늦었지만 조상들의 업적과 함께 친일 행동도 후손이 책임지는 작지만 용기 있는 행동 하나로 한국 사회는 조금씩 바뀔 거라 희망한다." 정지아(소설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2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