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간장 같은, 된장 같은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2.07.03. 14:16

엊저녁, 몸이 뿌드등하여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하릴없이 텔레비전 채널이나 돌려대는데 한 여배우의 표정이 시선을 붙잡았다.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와 경찰서 유치장에서 상봉을 한 모양이었다. 늘 사고만 치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 어린 딸은 눈물을 꿀꺽 삼키고는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나만 믿어. 내가 있잖아."

코믹하게 과장된 연기였지만 나는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씩씩함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나 같은 이기주의자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바다처럼 한량없이 깊은 어린 딸의 마음 앞에서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고아였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다. 부모님이 이 사회가 금기하는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스럽기 짝이 없는 가없는 사랑을 내게 베풀 때, 나이 들어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을 갚아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한 능력조차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때마다 나는 늘 가족으로부터 도망쳐서 책임질 무엇도, 구속하거나 구속당할 무엇도 없는, 철저한 고아이기를 내심 꿈꾸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내 곁에는 늘 부모님이 있었고, 힘들 때마다 그분들의 사랑이 버텨낼 힘이 되어주었다.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방패막이 하나 없이 홀로 바람 세찬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묵묵히 걸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보잘것없는 아버지라도 그 체온이 크나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아버지보다 나이 어린 여동생들은 아무 데로나 후딱 해치워졌다.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고 살라고 뿌리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시집간 고모 둘 중 하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자식 둘이 있었다는데 어머니가 없으니 외가와도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누군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여자들만 바글거리는 정문 앞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닳아서 뚫어지기 일보 직전의 검은 운동화코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청년이 자기 이름을 밝혔지만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나, 네 사촌 오빠야. 우리 어머니가 네 고모 되시지."

사촌오빠라는 말을 듣고도 나는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고모가 돌아가신 뒤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져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던 중간쯤에야 비로소 눈치를 챘지만, 나는 오빠의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이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느 신학대학에 합격해서 곧 서울로 떠난다는 오빠는 그날 제과점에서 내게 모찌 몇 개와 우유를 사주었고, 나는 말없이, 그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게 우물우물 모찌를 먹었다. 그날 이후 오빠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못난 나는 다시는 어색하지 않을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아직도 간혹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러나 친오빠인 듯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오빠의 단 한 번 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이제야 나는 오빠를 이해할 것 같다. 오빠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가족이라는 것이 그토록 간절히 그리웠던 것이다. 이미 가져서 소중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나와 달리 오빠는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오빠가 다시 찾아오면 이제 나도 오빠, 하고 다정히 불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날의 내 무뚝뚝함이 상처가 되었는지 오빠는 그 후 영 연락이 없다.

가족이란 간장이나 된장과 같다. 늘 있으니 소중한 줄을 모른다. 그러나 저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나 내 사촌오빠처럼 가족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디 소중한, 그립디 그리운 것이리라.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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