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모자라도 아름답다, 모자라서 아름답다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2.04.17. 14:07
정지아(소설가)

옛말 그르지 않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절감한다. 어린 시절,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키고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뭐래? 그러면 왜 맨날 공부하라고 하는 건데?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공부 잘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는 말 사이의 모순을, 그 모순 속에 담긴 삶의 이치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20여 년 전, 파리 망명객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진 씨를 만난 적이 있다. 60년대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소르본느로 유학 간 그는 곤경에 처한 후배를 숨겨 주었다가 반체제인사가 되어 환갑이 넘도록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에게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해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자기 아들이 온전치 않다는 걸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자서는 젖병을 들고 빨지도 못하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아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던 어느 날, 피로에 지친 이유진 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그만 죽으라고. 그 순간 아이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그날 이후 그는 아들을 받아들였다. 그런다고 왜 고통이 없었으랴. 단추 채우는 법, 신발 묶는 법, 버스 타는 법. 일상의 사소한 모든 과정이 아들에게는 투쟁이었고,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에게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 세월이 쌓여 아들은 마흔줄에 접어들었다.

얼마 전, 팔순 가까워지는 이유진 씨와 긴 통화를 했다. 서울내기로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그는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새침한 서울말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천사야. 그놈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까 싶어. 아들 때문에 그 좋아하는 와인도 끊고 타바코도 끊었잖겠어? 내가 그놈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근데 서울 사는 내 친구놈들 있잖아? 한때 날고 기었던 놈들이 전화만 하면 징징거려. 사는 의미가 없대. 나는 아들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나날이 샘 솟는데 말이야. 신기하지? 잘난 나는 삼십 년 동안 부모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들이 나이 들어 제 가족을 꾸리면 허망해진다. 부모는 여전히 자식을 자신의 생명보다 중히 여기지만 자식들은 저 사느라 바쁘고 제 자식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식들은 한때는 자신의 우주였던 부모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주겠거니, 늘 제 자식보다 뒷전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유진 씨는 말했다. 자신은 마흔 넘은 아들의 우주라고. 그래서 팔순 가까운 지금도 존재의 의미가 있노라고. 장애를 가진 아들이 팔순 넘은 아버지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하고 잘난 것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못난 것은 못난 것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대로 다 쓰임이 있고 의미가 있다. 때로는 못나고 부족한 것이 더 큰일을 해내기도 한다.

내가 키우는 수컷 고양이 저냥이는 머리가 나빠 막대 모양의 간식을 먹지도 못한다. 멍청한 데다 눈치도 없어서 내가 싫어하거나 말거나 저 좀 만져달라고 막무가내로 힘차게 머리를 들이민다. 처음에는 멍청하다는 이유로 늘 구박했다. 어느날 저냥이를 만지다 깨달았다. 고양이 네 마리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쓰다듬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저냥이라는 걸.

"아이구, 멍청하고 예쁜 것!"

혼자 중얼거리다 이내 정정했다.

"아이구, 멍청해서 예쁜 것!"

저냥이가 똑똑하고 눈치 빨랐다면 막무가내로 머리를 디밀었을 리 없다. 멍청하니까 내 반응을 알지 못해서 아무 때나 내 사랑을 갈구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가장 친한 사이가 되었다. 멍청해야만 가능한 일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다. 똑똑하고 잘난 것들은 웬만해서는 참지 않는다. 그들이 팽개치고 떠난 자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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