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 대가 오지호의 창작실
30년 살던 터전이자 市기념물
민족시인 문병란 지산동 가옥
문학·민주인사 교류하던 장소
소촌동 용아 박용철 생가도
초가집과 돌담 원형 유지 보존
시인 세계 엿볼 수 있는 무대

[마을 문화원형의 재발견] ⑤광주 동구 오지호가옥
지난 2020년 지산동 한 마을의 일부 주민이 걸어놓은 현수막으로 광주가 발칵 뒤집혔다.
골자는 낙후된 마을 재개발을 추진해 공동주택을 건설하겠다는 건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마을에는 광주시 기념물이 있었기 때문. 이 기념물은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지정됐다. 오지호 화백이 1954년부터 1982년 작고 직전까지 살던 오지호 가옥이다.

◆문화적 가치 덕분에 재개발 위기 넘겨
사업을 추진하려는 일부 주민은 오지호 가옥으로 인해 마을 일대 주민이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며 지금이라도 매입해 허물고 마을을 재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지호 가옥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이라 결국 이들의 도전은 실패했지만 소중한 우리 지역 자산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오지호 가옥의 주인, 오지호는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적 인상주의를 구현한 거목으로 손꼽힌다.
많은 국민에게 친숙한 그의 작품 '남향집'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그의 고향은 화순 동복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서울 휘문고로 진학해 한국에서는 처음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희동을 스승으로 만나 회화를 배웠다. 이후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이때 인상주의를 만나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것에 머무르지 않고 남도적 색채가 가득한 인상주의 화풍을 구현하는 등 그만의 색채가 가득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서양화단을 이끌었다.
지역 서양화단을 단단히 만들어가는데 함께 한 어른이기도 했다. 조선대 미술과 창설에 참여해 10여년 교육가로서 살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 원로들에 의하면 어딜 가나 눈에 띄었던 오지호 화백은 이같은 점을 활용해 광주 곳곳에서 열리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일부러 찾아다니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등 후배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왔다고 한다.
오지호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가였다. 개성에서 교사로 머물던 시절엔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기록화 제작 의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는 말년까지도 문화재 보존운동 등 사회운동에 투신하고 청빈한 삶을 이어가며 지사적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오지호의 삶이 녹아 있는 오지호 가옥에서 5분 거리에는 문병란 가옥이 있다.
재개발 추진 논란 당시, 일부 주민이 문병란의 집이 문학관으로 조성되면 주민이 재산권을 더욱 행사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문학관 조성 반대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시인 문병란 별세 전까지 작품 활동
문병란은 시 창작과 시 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그의 시 '직녀에게'는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유명 작품이다.
1975년부터는 반독재 항쟁에 참여해 왔으며 80년 5월 당시엔 내란선동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민족 시인으로 불린다.
현재 시인 문병란의 집이 된 그의 지산동 가옥은 1980년부터 2015년 그가 별세하기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그가 작품을 집필한 것은 물론 문학인, 민주인사들이 드나들며 교류하던 장소로 의미를 갖는다. 그의 가옥은 현재 문학관으로 변모했다. 그의 저서와 유품, 서재와 침실 등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시인 문병란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어 시인의 삶과 정신을 오래도록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용아의 시 세계와 삶 공유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용아 박용철의 생가도 초가집과 돌담을 원형 그대로 유지한 채 시민과 교우하며 용아의 시 세계와 삶을 공유하고 있다.
시인 박용철은 광주에서 태어나 배재고보를 다니고 일본과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김영랑 등과 어울리며 순수시적 경향을 보여왔다.
그의 시 '떠나가는 배'는 '나 두 야 간다(후략)'으로 유명한 그의 대표작이다.
희곡 번역에도 관심을 두어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인형의 집' 등을 번역하기도 했으나 서른다섯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해 생전 자신의 작품집을 내지 못했다.
현재 용아 생가에서는 지자체가 용아의 작품과 삶을 되새기는 다양한 시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비교적 시민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들의 삶과 흔적, 생각 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이들만의 공간은 해당 지역만이 가진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자원이다. 크고 화려한 고궁 등 만이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작고 노후했을지라도 시대 속 인물들의 정신과 삶이 담긴 공간 또한 문화유산으로 우리 모두 인식해야 한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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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물적 측면 반영···적절한 복원 필요" 김희태 전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1920년대 광주에 기차가 들어온 것을 계기로 도시가 빠르게 발달하고 규모도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희태 전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은 "1896년에 전남도청이 광주에 들어서면서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도시 발전의 기반 축이 철도와 도로인데, 대인동을 포함한 구성로는 광주역이 있는데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이 조성되면서 광주의 교통 중심지로 부상했다"고 말했다.시외버스공영터미널은 1976년 9월 대인동 1만7천686㎡ 부지에 건립됐다.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대합실만 해도 3천305㎡가 넘는 큰 규모였지만 전국 각지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매일 북적였다.구성로는 세칭 '구역전통'으로 불리며 널리 알려진 길이다. 계림동의 광주고등학교 앞을 기점으로 대인동, 금남로5가, 충장로5가, 수기동을 거쳐 월산로터리에 이르는 도로를 말한다. 1922년 광주역이 생긴 이후 구성로는 광주 시내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946년 금남로5가에 시외버스 역사의 시작을 알린 광주여객이 생겼고, 동방여객(1949년), 중앙여객(1954년), 금성여객(1955년), 남도여객(1956년), 광신여객(1961년) 등 많은 버스 회사들이 잇따라 구성로 주변에 위치했다.구성로가 광주의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가 되면서 사람이 많이 찾는 도심도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더욱 확장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버스를 이용하거나 기차를 타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인근 상가도 덩달아 번창했고, 인근의 대인시장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철도와 버스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광주역이 중흥동으로 이전하면서 버스 손님과 분리돼버렸고 점차 활기를 잃어가고 말았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역시 1992년 7월 광천동으로 이전했고 광주은행 본점, 롯데백화점 광주점 등이 들어섰다.광주역 터가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옛 광주역사를 복원해 학생독립운동의 정신과 유산을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김 전 위원은 "광주역사를 복원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면서 "광주는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고 지상 구조물이 많이 들어선 만큼 어떻게 복원하는 것이 좋은 해법인가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그는 "예전의 건물을 그대로 복원한다고 전제하면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서 "하나의 현상이나 인식, 정신의 복원 측면과 물적 증거물로서의 건물 등의 복원 측면을 적절히 고려하고 절충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김 전 위원은 또 "광주역 터 인근에 빈 건물이나 공간이 있을 경우 지자체가 이를 매입하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면서 "이곳에 적절한 안내 시설과 당시를 엿볼 수 있는 조형물 등을 설치해 놓는다면 광주 정신이나 문화가 복원되고 현장성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 · 굴곡진 광주 역사(歷史)와 희로애락 함께 한 역사(驛舍)
- · 온몸으로 밀고 당기는 사이 경쟁·협동심 쑥쑥
- · "놀이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기본 바탕"
- · "생가나 가옥, 무형의 가치 풀어낼 매개체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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