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나서 日군과 치열한 전투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거병 계획
최택현과 문중 20여명 참여·활동
석정리, 영산포 주둔한 日군 공격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⑫나주 수성 최씨 문중
마한의 중심이자 임진 의병, 한말 의병의 중심지가 나주였다. 나주는 고려 시대 나주목이라 해 전주목과 함께 전라도의 명칭 기원이 됐던 고을이었다.
지금도 나주의 슬로건은 '목사골 천년'이다. 물론 필자는 목사골 천년에 거부감도 있다.
'마한 왕도(王都), 2천년'이라는 나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있는데도 말이다. 목사골 천년이 강조되면 그 이전의 나주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몇년 전 전남도에서 '남도의병 역사공원' 건립 후보지를 공모하자 지자체 몇군데가 지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그것을 물었을 때 의병공원은 당연히 나주가 돼야 함을 이야기했다.
나주는 남도 의병의 선구인 김천일 의병장이 이끄는 나주 의병과 그 나주 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한말 나주 의병이 의병전쟁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자의 주관이 작용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기록자가 처한 상황을 알아야 역사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나주 의병의 상징인 김천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대표적 예이다. 진주성을 사수하다 남강에 투신한 김천일을 당시 남인으로 전쟁을 지휘한 유성룡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친 조정의 명령을 어겼다고 해 평가를 박하게 했다.
반면 김천일과 같은 서인 출신인 보성 출신 대학자 박광전은 그의 진주성 사수 작전이 호남을 지키는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은 이항복은 김천일의 진주성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1896년 2월 초 장성에서 이동해 온 기우만 등 장성 의병과 합류한 나주 의병이 최초로 거병을 고한 곳이 김천일의 사당이다. 임진 나주 의병이 이후 남도 의병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임진왜란기에 활동한 나주 의병은 김천일 외에도 그 이름 셀 수 없다. 이 가운데 다시지역에 세거하며 세력을 형성했던 수성 최씨 가문이 단연 돋보인다.
수성 최씨 가문 가운데 최낙궁의 다섯 아들 모두 임진, 정유 전쟁에 빛나는 활약을 했다.
문과에 급제해 좌랑직에 올랐던 희열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 장군을 도왔고 둘째 희윤은 기효증 의병장, 셋째 희급과 넷째 희민과 희급의 아들 진은 김천일 의병장과 함께했다.
막내인 희량은 무과 급제 후 정유재란 때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을 도와 7전 전승의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낙향했다. 훗날 희량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시호는 무숙이었다.
나주는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칭했던 김태원, 김율 형제를 비롯해 박사화, 박민홍·박여홍 형제, 권영회, 조정인 등 이름 석자만 이야기해도 알 수 있는 의병들이 많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 전쟁을 빛냈던 수성 최씨의 의로운 정신은 한말 의병에 그대로 이어졌다.
같은 동리 한 문중이 중심이 돼 의병부대를 결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직의 귀재 구례 출신 유병기 의병장은 김태원 의병장을 만나 의병부대 결성을 의논했다.
1907년 8월 1일 해산된 대한제국 병사들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사기가 크게 고양됐고, 의병 부대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조직되고 있었다.
장성 유학자인 기삼연은 영광, 나주, 함평, 담양, 화순 등 지역 의병 지도자들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했다. 이때 김태원, 심남일 등 많은 의병 지도자들이 의진을 구성해 합류했다. 연합의진이 결성된 것이다.
이 무렵 나주에서도 지사들이 의병부대를 자발적으로 구성해 서로 합진을 구성했다. 송석래 의병장도 고향을 중심으로 의진을 구성해 김태원 의진과 합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어등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무렵 송석래 의병장이 거병한 곳과 가까운 곳의 다시면 동곡리 동촌마을의 수성 최씨 문중들도 거병을 계획했다. 이들의 중심에 최택현이 있었다.
지난 19일 최택현이 의진을 결성한 마을을 후손 최영진 선생과 함께 찾았다. 1859년생으로 당시 50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종형인 최광현, 종제 최병현, 아들인 윤용과 함께 의병을 규합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수성 최씨 문중 2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이 조직한 의병부대는 김태원 의진과도 연계가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마을의 한 문중이 의병부대를 결성한 예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들의 의진 결성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이들은 마을과 가까운 학교 석정리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와 영산포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부대를 공격했다. 일본군 가까이 있는 수성 최씨 문중 의병부대의 존재는 일본군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최택현 의진은 용전분투했다. 최택현과 종형제, 그리고 그의 아들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광현 55세, 택현 48세, 병현 47세, 윤용 26세였다.
이들을 포함해 다른 의병들도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을 것이다. 1909년 8월이었다.
현재 밝혀지지 않은 이들의 신원을 찾아야 비로소 동곡 수성 최씨 문중 중심 의병부대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의병부대 결성 과정에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일본군과 전투를 몇 차례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윤용의 아내 나주 임씨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애도했다. 그리고 돌을 껴안고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현재 나주 다시 동곡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1년에 세워진 것인데, 전남대 국사교육과 송정현 교수가 찬한 '충의사'라는 제목의 비문이었다.
이들 4명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그리고 비석 옆에 목숨을 끊은 나주 임씨의 충절을 기리는 '열부(烈婦) 나주 임씨 실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필자는 이번 미서훈 용역 작업을 하면서 남도 의병 795명의 명단을 확인했다. 일본군 전투 기록과 당시 수형자 명부 등에서 확인한 것들이다. 불과 1년 남짓 작업해 찾아낸 것이다.
필자는 이들의 역사를 차분히 복원하여 역사적 평가를 받게 하려고 한다. 동곡마을의 수성 최씨 의병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등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태원 의진의 상당수 의병들의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다.
이들을 찾는 데 우리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남도가 추진한 미서훈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에 기업들까지 참여해 홍보에 나섰다고 한다. 총괄 책임자인 필자에게, 또는 전남도를 통해 필자에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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