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체결 후 국권 회복 위해
선비·군수 잇따라 만나 거병 논의
여러번 퇴짜 끝에 나주 김태원 만나
김태원 부대서 참모장…창평서 공적
이후 양상기 부대에 합류해 부상 투혼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⑪유병기
대한제국을 빛낸 수많은 의병 가운데 구례 출신 유병기(劉秉琪)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유병기의 활동을 추적하면 그가 의병부대 조직의 귀재임을 느낄 수 있다. 권영회가 작전의 귀재였다면, 유병기는 조직의 명수(名手)였다고 한다.
유병기의 빛나는 공적은 관련 판결문과 심문조서, 일본군 전투 기록 등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1883년 구례군 마산면 복곡면 강정리(형 집행원부)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이명은 원집으로도 불렀다. 일본군 심문조서에 '양반'이라고 나와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인 송병선을 존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두 차례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리고, 그해 12월 30일 음독 자결했다.
송병선의 음독에 충격을 받은 유병기는 거병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유병기가 거병을 생각한 것은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무렵부터였다. 그는 간재 전우, 송사 기우만, 우담 곽종석 등을 찾아 거병을 상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대 지조 있고, 명망 있는 선비였다. 하지만 이들은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거병에는 이르지 못했다.
가령, 곽종석은 의병 역량의 불충분함,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는 없는 점, 일제에 오히려 침략 명분을 준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대신 10년간 가르치는 데에 힘을 다하고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유병기는, 담양·장성·함평·보성·정읍·무주 등 여러 지역의 군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거의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문조서에 "(유병기는) 통감부를 무너뜨리고 일본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할 생각으로 김태원, 김율 등과 의논하여 의병이라고 칭하는 비도(匪徒)를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나와 있다. 유병기의 거병 동기가 드러나 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며 의병전쟁이 본격화됐다. 나주에서 김태원·김율 형제가 거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병기는 김태원을 찾았다.
김태원·김율 형제, 백낙구, 조기채와 거의를 논의했다. 유병기 심문조서에는 유병기가 김태원에게 거병할 것을 꺼낸 것으로 나와 있다.
김태원을 상장으로, 김율을 중군장으로, 백낙구를 후군장으로, 조기채를 기포장으로, 유병기는 참모장이 됐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김태원 의병부대가 결성됐다. 유병기를 조직의 명수라는 말이 나온 까닭이다. 김태원도 작전 수행 중 유병기의 판단을 존중할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융희 2년(1908년) 8월 김태원이란 자가 수괴가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면서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라는 명목으로 도당 약 6백 명을 모아 총 약 4백정을 수집하고 이 일단의 도당과 함께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전남 영광, 함평, 장성, 나주, 광주, 창평, 담양, 동복 등 각 군내에 제멋대로 다녀 위 수괴 김태원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다"고 나와 있다. 김태원, 유병기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군수품은 1장의 통문으로 쉽게 조달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민중의 신망도 높았다.
김태원, 유병기 의진은 1907년 9월 중순 흥덕군 사진포에 있던 일본인 가옥 3동 소각, 12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 3명 사살, 1908년 2월 창평에서 일본군 수명 사살, (쌍)안경 1점, 단검 1점, 일본군도 1점을 노획하였다. 창평 전투는 엄청난 전과였다.
김태원의 경우 전리품을 집에 가져다 놓은 것을 아들 경천이 가지고 놀다 일본군에 끌려가 하루 종일 고문받은 끝에 반신불구가 됐다.
장성군 서이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유병기 자신도 우측 어깨와 우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유병기는 영광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여 일본군 기병 중위 등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광주와 나주의 경계인 용진산, 순창 산막 등 도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막 전투에서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했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에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기포장 조기채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유병기 자신도 왼쪽 어깨와 좌복부에 총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유병기는 동 2년 10월(음력 9월) 경에 전기 양상기가 다중을 모아 친히 수괴로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고 총을 휴대한 도당 약 70명과 함께 동년 3월(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장성·담양·광주·창평 등 각 군내에 횡행하여 위 수괴 양상기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유병기가 양상기 부대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부상을 추스린 유병기가 양상기 의병에 합류했음을 알려준다. 이제 유병기는 양상기와 함께 의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의 활약상을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제6. 피고 양명은 동 3년 3월 2일 밤(음력 2월 1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동면 남산리로 난입하여 동리에 거주하는 정준필 및 국사윤을 붙들고 동군 두면(豆面) 연동(蓮洞)으로 연행하여 동소에서 위 양인에 대하여 돈 1만 냥을 지출치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약 3~4일 후에 동소에서 그 마을의 이장 남준여(南俊汝)의 손을 거쳐서 위 양인에게 각각 돈 2백 냥씩 겁취하였고,"
"제7. 피고 양명은 동년 3월 5일(음 2월 14일)밤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을 휴대한 도당 약 50여 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강정리로 난입하여 그 마을 부자 수명을 붙들어 발포 위협한 뒤 한충여에게 쇠 돈 3냥 외에 1점과, 김도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1점과, 한내진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겁취하였고,"
"제8.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11일(음력 윤 2월 2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木面) 남산리(南山里)로 난입하여 그 마을의 이장 김석필(金石必)에 대하여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협박하여 동인에게 돈 1백 50냥을 겁취하였고,(이하 생략)"
양상기와 연합의진을 구성했던 유병기는 양상기와 부대 의병에 이견이 있어 의진을 나와 고향 구례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중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광주로 이송돼 양상기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 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됐다. 1910년 6월 16일이었다.
재판에 관여한 판사가 5명인데, 재판장을 포함해 3명이 일본인, 2명이 한국인이었다. 1909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결과였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9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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