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병 또 거병···구례를 빛낸 '조직의 명수'

입력 2023.11.19. 15:06 이관우 기자
⑪유병기
을사늑약 체결 후 국권 회복 위해
선비·군수 잇따라 만나 거병 논의
여러번 퇴짜 끝에 나주 김태원 만나
김태원 부대서 참모장…창평서 공적
이후 양상기 부대에 합류해 부상 투혼
유병기 체포를 보고한 일본 경찰 문서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⑪유병기

대한제국을 빛낸 수많은 의병 가운데 구례 출신 유병기(劉秉琪)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유병기의 활동을 추적하면 그가 의병부대 조직의 귀재임을 느낄 수 있다. 권영회가 작전의 귀재였다면, 유병기는 조직의 명수(名手)였다고 한다.

유병기의 빛나는 공적은 관련 판결문과 심문조서, 일본군 전투 기록 등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1883년 구례군 마산면 복곡면 강정리(형 집행원부)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이명은 원집으로도 불렀다. 일본군 심문조서에 '양반'이라고 나와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인 송병선을 존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두 차례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리고, 그해 12월 30일 음독 자결했다.

송병선의 음독에 충격을 받은 유병기는 거병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유병기가 거병을 생각한 것은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무렵부터였다. 그는 간재 전우, 송사 기우만, 우담 곽종석 등을 찾아 거병을 상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대 지조 있고, 명망 있는 선비였다. 하지만 이들은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거병에는 이르지 못했다.

가령, 곽종석은 의병 역량의 불충분함,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는 없는 점, 일제에 오히려 침략 명분을 준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대신 10년간 가르치는 데에 힘을 다하고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유병기는, 담양·장성·함평·보성·정읍·무주 등 여러 지역의 군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거의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문조서에 "(유병기는) 통감부를 무너뜨리고 일본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할 생각으로 김태원, 김율 등과 의논하여 의병이라고 칭하는 비도(匪徒)를 모집하여 일본군과 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의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나와 있다. 유병기의 거병 동기가 드러나 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며 의병전쟁이 본격화됐다. 나주에서 김태원·김율 형제가 거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병기는 김태원을 찾았다.

유병기의 항전 사실을 기록한 일본 자료

김태원·김율 형제, 백낙구, 조기채와 거의를 논의했다. 유병기 심문조서에는 유병기가 김태원에게 거병할 것을 꺼낸 것으로 나와 있다.

김태원을 상장으로, 김율을 중군장으로, 백낙구를 후군장으로, 조기채를 기포장으로, 유병기는 참모장이 됐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김태원 의병부대가 결성됐다. 유병기를 조직의 명수라는 말이 나온 까닭이다. 김태원도 작전 수행 중 유병기의 판단을 존중할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융희 2년(1908년) 8월 김태원이란 자가 수괴가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면서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라는 명목으로 도당 약 6백 명을 모아 총 약 4백정을 수집하고 이 일단의 도당과 함께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전남 영광, 함평, 장성, 나주, 광주, 창평, 담양, 동복 등 각 군내에 제멋대로 다녀 위 수괴 김태원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다"고 나와 있다. 김태원, 유병기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군수품은 1장의 통문으로 쉽게 조달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민중의 신망도 높았다.

김태원, 유병기 의진은 1907년 9월 중순 흥덕군 사진포에 있던 일본인 가옥 3동 소각, 12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 3명 사살, 1908년 2월 창평에서 일본군 수명 사살, (쌍)안경 1점, 단검 1점, 일본군도 1점을 노획하였다. 창평 전투는 엄청난 전과였다.

김태원의 경우 전리품을 집에 가져다 놓은 것을 아들 경천이 가지고 놀다 일본군에 끌려가 하루 종일 고문받은 끝에 반신불구가 됐다.

장성군 서이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유병기 자신도 우측 어깨와 우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유병기는 영광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여 일본군 기병 중위 등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광주와 나주의 경계인 용진산, 순창 산막 등 도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막 전투에서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했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에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기포장 조기채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유병기 자신도 왼쪽 어깨와 좌복부에 총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유병기는 동 2년 10월(음력 9월) 경에 전기 양상기가 다중을 모아 친히 수괴로 되어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고 총을 휴대한 도당 약 70명과 함께 동년 3월(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장성·담양·광주·창평 등 각 군내에 횡행하여 위 수괴 양상기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유병기·양상기의 교수형을 확정한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

유병기가 양상기 부대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부상을 추스린 유병기가 양상기 의병에 합류했음을 알려준다. 이제 유병기는 양상기와 함께 의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의 활약상을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제6. 피고 양명은 동 3년 3월 2일 밤(음력 2월 1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동면 남산리로 난입하여 동리에 거주하는 정준필 및 국사윤을 붙들고 동군 두면(豆面) 연동(蓮洞)으로 연행하여 동소에서 위 양인에 대하여 돈 1만 냥을 지출치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약 3~4일 후에 동소에서 그 마을의 이장 남준여(南俊汝)의 손을 거쳐서 위 양인에게 각각 돈 2백 냥씩 겁취하였고,"

"제7. 피고 양명은 동년 3월 5일(음 2월 14일)밤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을 휴대한 도당 약 50여 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강정리로 난입하여 그 마을 부자 수명을 붙들어 발포 위협한 뒤 한충여에게 쇠 돈 3냥 외에 1점과, 김도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1점과, 한내진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겁취하였고,"

"제8.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11일(음력 윤 2월 2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木面) 남산리(南山里)로 난입하여 그 마을의 이장 김석필(金石必)에 대하여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협박하여 동인에게 돈 1백 50냥을 겁취하였고,(이하 생략)"

양상기와 연합의진을 구성했던 유병기는 양상기와 부대 의병에 이견이 있어 의진을 나와 고향 구례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중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광주로 이송돼 양상기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 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됐다. 1910년 6월 16일이었다.

재판에 관여한 판사가 5명인데, 재판장을 포함해 3명이 일본인, 2명이 한국인이었다. 1909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결과였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9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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