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군 봉황면 출신…남도 최고 지략가
심남일 부대 호남의소의 작전참모 역할
거성동 전투서 매복 등 작전 세워 공적
주요 의병부대 옮겨다니며 작전 진두지휘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⑩권영회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를 기리는 날이다.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예병과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벌였던 '대한제국 의병들' 대부분이 조국 산하에 피를 뿌렸다.
일제강점기에 3·1운동을 비롯해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 국내외에서 우리 선열은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쓰러져 갔다. 이들의 빛나는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빛나는 역사, 우리 세대가 정리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지난 12일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 있는 대한제국 의병 가운데 최고 작전전문가로 알려진 권영회를 만나러 갔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이다.
'의병장'이라는 빛나는 명칭 대신, '애국지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충절비가 있는 곳에는 상자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찌 경건한 마음이 들겠는가. 우리의 현주소이다.
함평 출신 심남일은 영암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호남의소(湖南義所)'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대장, 모사장, 서기 겸 모사, 도집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도통장, 군량장 등 정규군과 같았다. 이러한 의진은 다른 의병부대와 비슷하다.
호남의소의 부대편성에서 특이한 편제는 '모사장'의 존재이다. 모사장(謀事長)은 요즘으로 말하면 '작전참모'에 해당한다. 호남의소에서는 모사장이 대장 바로 다음 직책이다. 모사장 역할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을 보필한 모사장으로 권영회가 있다. 안동 권씨들 집성촌이었던 남평군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 출신인 그의 호는 월산, 자(字)는 택(澤)이었다. 그의 빛나는 전투 일지는 판결문 및 심남일 실기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09년 3월 8일의 남평 거성동에서 호남의소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남도 의병이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심남일 부장, 강현수(무경), 박봉주, 박채홍 등이 이끄는 연합 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였다.
전투를 앞두고 권영회가 점을 치는 장면이다.
"권영회가 점을 치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라고 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권영회의 작전에 따라 연합 의진이 매복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작전에는 박민홍·여홍 형제가 이끄는 의병부대도 참전했다.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서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특히 의병장 박민홍의 아우인 박여홍·박태환·박기춘 등이 전사하였다.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 의병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이다.
의병이 거성동 전투에서 승리한 데는 효율적인 연합 의진을 구성한 데다 적을 유인해 기습 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 권영회 공이 크다. 권영회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판결문이 당시를 이해하게 한다.
"제1. 피고(권영회)는 융희 2년 7월 26일(음력 6월 28일)에 폭도 수괴 심남일(沈南一)이가 총 약 60정을 휴대한 도당 약 60~7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모사(謀士)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0월(음력 9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전라남도 영광·강진·장흥·남평 등 각 군내에서 군대·헌병대·순사대의 진무(鎭撫)에 대하여 5회에 걸쳐서 반항하여 위 수괴 심남일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1908년 7월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이 부대를 결성할 때 '모사', 곧 작전참모의 역할을 맡아 심남일을 도와 10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영광, 강진, 장흥,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권영회는 그해 10월 무렵 조경환 부대로 옮겨 같은 해 12월까지 '모사'를 맡았음을 다음 판결문은 말하고 있다.
"제2. 피고는 동년 10월경(음력 9월경)에 폭도 수괴 조경환이가 총 약 1백여 정을 휴대한 도당 약 1백여 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모사(謀事)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함평·광주 등 각 군내에서 헌병의 진무에 대해서 4회에 걸쳐서 반항하여 위 수괴 조경환의 폭동행위를 방조하였고,"
"제3. 피고는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에 폭도 수괴 박민홍(朴珉洪)이가 총 약 4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5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책임을 지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 3년 3월경(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나주·남평 등 각 군내에서 일본군대의 진무에 대항하여 2회에 걸친 위 수괴 박민홍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권영회가 같은해 12월 박민홍의 참모장이 돼 이듬해 3월까지 작전참모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나와 있다.
판결문을 통해 권영회가 작전 수행의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권영회가 심남일, 조경환, 박민홍 등 주요 의병부대를 옮겨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의병부대가 각기 독립된 부대를 바탕으로 연합의진을 구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권영회가 이들 의진을 옮겨 다니며 연합작전을 지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권영회가 의병부대를 오가며 연합작전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지략을 높이 평가해 모사장직을 신설한 심남일 의병장의 탁월한 지휘력이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무경)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는 변화무쌍한 작전을 구사한 호남의소의 모습을 말한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권영회는 중과부적으로 체포됐다. 1910년 7월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그의 공적으로 볼 때는 독립장 이상은 능히 된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들불처럼 일어난 남도 의병,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전선에 앞장서 왔다. 사진은 조선 오란(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이인좌의 난)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호남 의병 2천143위를 기리는 충의사 호국충혼탑.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⑮끝·에필로그?지난 7월 25일 광복회 전남지부 회원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시원인 백두산(중국 장백산)이 천지와 간도 일대를 답사했다. 천지 비경을 보는 것은 날씨가 예측 불허해 운이 따라야 했다.올라가는 데 비가 쏟아지더니 천지를 보려고 할 때 구름이 살짝 걷히며 비경을 살포시 드러냈다. 신비로웠다. 단군신화가 떠올랐다.천지 올라가는 낡은 지프를 타려고 무려 2시간 넘게 줄을 섰다. 평일인데도 수만 명이 몰려 있었다. 충격이었다.대한민국 국민은 우리 팀 말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말 안내판도 없다. 이상하다.중국인에게 장백산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렸을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조선족 출신 가이드에게 물었다. 2007년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 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이다.천지 입구에 영상물 상영하는 공연장이 있었다. 백두산의 사계(四界)를 소개하는 데 천지에 말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중국 역사를 열었음을 웅장하며 신비롭게 묘사했다. 이른바 장백산에서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단군국조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역사가로서 느낀 자괴감은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의 토대이다.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존립의 근거가 없다.1907년 8월 1일 일제는 기습적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해 국권 침탈을 노골화했다. 서울 시위대 박승환 대대장은 부대 해산명령 대신 자결을 통해 부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서울 시위대, 지방 진위대 등 자랑스런 대한제국 군인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의병봉기가 의병 전쟁으로 발전했다. '13도 창의군'이라 해 1만명 이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일본이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남도 의병장들이 광주감옥에 투옥됐다.남도 의병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만 2년 동안 일본군과 400차례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거의 이틀에 한 차례 전투가 치러진 셈이다.1909년 통계를 보면 남도 의병이 전국 의병 봉기의 60%를 차지했다. 일본이 정규군을 투입하고도 의병들을 쉽게 격파하지는 못했다. 비록 화승총으로 무장해 일본군과 정상적인 전투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렀다.일본의 식민통치 야욕을 그만큼 늦추게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랑스런 남도 의병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다. 서훈자는 전국 통계의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이는 후손이 끊어졌거나 개인이 공적을 입증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렇더라도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알 수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에 전남도는 전국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유일하게 미서훈 독립유공자를 찾는 일을 시작했다. 3·1운동 관련 미서훈자를 찾는 1단계에 이어 1895년 의병계열부터 1945년 해방 순간까지 우리 지역에서, 우리 지역 출신들이 국내외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2단계 용역이다.2022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용역은 11월 15일 기준 의병계열 795명을 포함해 2천300여 명에 달하는 미서훈 독립운동가를 발굴했다.의병계열은 그 공적을 입증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적어도 150명 남짓 서훈 신청이 가능하리라 본다. 60년 넘게 333명 서훈 신청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이다.남도 의병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는 노력도 부족했다. 일본이 편의상 분류한 이른바 '거괴(巨魁)'라 불렸던 심남일, 김태원 형제, 고광순, 안계홍 등 몇몇에 국한해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남도를 빛낸 많은 의병의 전적이 드러나지 않았다.예컨대 고흥 팔영산 만경암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고흥 의병 120명, 구체적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수형인 명부가 있는 보성 의병,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의 주력을 형성한 어쩌면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를 형성한 영암의병 등의 존재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특히 완도, 진도, 신안 등 남도의 많은 섬 지역에서도 의병들의 활동도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형 군함까지 파병한 일본군은 때로는 해상에서 함포 사격까지 가하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남도 곳곳에서 전개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동안 피상적으로 살펴 남도 의병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직도 일본군과 싸워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위대한 의병전쟁을 의병운동으로 성격을 짓거나 연합 의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산돼 활동해 항전이 실패했다는 주장이 그 예이다.어등산은 김준·조경환·김원범 의병장 등을 포함한 한말 의병이 최소한 50여 명이 전사한 격전지다. 사진은 한말 의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대한제국기 남도 의병은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2년 넘게 최후의 1인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장렬하게 옥쇄(玉碎)를 택했다. 그리고 그 의병 정신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이러함에도 한말 남도 의병의 활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이러한 문제 의식을 토대로, 무등일보는 그동안 살피지 못한 의병의 실체를 추적한 특별기획 연재를 했다. 보성 의병을 개척한 정태화, 나주 의병을 상징한 송석래·최택현, 연합의진의 상징 김치홍, 작전의 귀재 권영회, 조직의 귀재 유병기 그리고 고흥 의병을 이끈 신성구 등 새로운 의병 열전을 만들었다. 남도 의병의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지고, 성격 규명도 보다 분명해졌다.기획연재와 더불어 대중강연을 통해 남도 의병의 활약상을 널리 알렸다. 국내 의병 관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이태룡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장은 남도 의병의 핵심을 형성했으나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영암 의병의 의의를 심층적으로 설명해 지역민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학술포럼을 통해선 영암 의병의 실체를 밝혔다. 을미의병에서 남도 의병의 역할을 밝힌 장우순 박사, 그리고 해상 의병의 실체를 밝힌 신혜란 박사의 글 등은 그동안 학술포럼에서 쉽게 접하지 않은 주제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포럼에서 얻은 성과였다.남도 의병의 실체 규명, 빛나는 항전을 전개한 새로운 주역 발굴 및 이들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까지 소개함으로써 역사의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결과였다. 앞으로도 남도 의병은 우리 민족사를 비추는 존재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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