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매복 공격으로 일본군 일망타진한 작전의 귀재

입력 2023.11.15. 18:59 이관우 기자
⑩권영회
남평군 봉황면 출신…남도 최고 지략가
심남일 부대 호남의소의 작전참모 역할
거성동 전투서 매복 등 작전 세워 공적
주요 의병부대 옮겨다니며 작전 진두지휘
권영회 판결문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⑩권영회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를 기리는 날이다.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파한 일본 정예병과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벌였던 '대한제국 의병들' 대부분이 조국 산하에 피를 뿌렸다.

일제강점기에 3·1운동을 비롯해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 국내외에서 우리 선열은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쓰러져 갔다. 이들의 빛나는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빛나는 역사, 우리 세대가 정리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지난 12일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 있는 대한제국 의병 가운데 최고 작전전문가로 알려진 권영회를 만나러 갔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이다.

'의병장'이라는 빛나는 명칭 대신, '애국지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충절비가 있는 곳에는 상자 박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찌 경건한 마음이 들겠는가. 우리의 현주소이다.

함평 출신 심남일은 영암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호남의소(湖南義所)'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대장, 모사장, 서기 겸 모사, 도집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도통장, 군량장 등 정규군과 같았다. 이러한 의진은 다른 의병부대와 비슷하다.

호남의소의 부대편성에서 특이한 편제는 '모사장'의 존재이다. 모사장(謀事長)은 요즘으로 말하면 '작전참모'에 해당한다. 호남의소에서는 모사장이 대장 바로 다음 직책이다. 모사장 역할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을 보필한 모사장으로 권영회가 있다. 안동 권씨들 집성촌이었던 남평군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 출신인 그의 호는 월산, 자(字)는 택(澤)이었다. 그의 빛나는 전투 일지는 판결문 및 심남일 실기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09년 3월 8일의 남평 거성동에서 호남의소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남도 의병이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심남일 부장, 강현수(무경), 박봉주, 박채홍 등이 이끄는 연합 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전투였다.

전투를 앞두고 권영회가 점을 치는 장면이다.

"권영회가 점을 치니 점괘에 '두 호랑이가 다투어 싸우는데 서쪽들이 어떻게 변했는가'라고 하였기로, 즉시 군중에 영을 아래와 같이 내렸다.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하여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하여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하여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德龍山)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屛巖峙)에 매복하여 서로 응원하게 하라."

안동 권씨들 집성촌이었던 남평군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 출신인 권영회는 대한제국 의병 가운데 최고 작전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에 있는 '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권영회의 작전에 따라 연합 의진이 매복해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작전에는 박민홍·여홍 형제가 이끄는 의병부대도 참전했다.

"8시경, 능주에 있는 적 20여 명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므로 우리 의병부대가 일제히 사격하여 적 15명을 죽였다. 10시경 광주·나주·남평에 있는 적 60명이 북쪽에서 들어와 싸움을 걸기로, 우리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적의 장수인 경무사(警武師)와 졸병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영암에서 들어온 적 10여 명은 이미 서남 간에 매복한 우리 군사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번 싸움에서 적을 잡은 것이 70여 명에 달했고, 우리 군사도 약간 명이 죽었는데, 특히 의병장 박민홍의 아우인 박여홍·박태환·박기춘 등이 전사하였다. 여홍·태환은 박민홍의 좌·우익장이었고, 기춘은 본진 총독이었다." 의병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이다.

의병이 거성동 전투에서 승리한 데는 효율적인 연합 의진을 구성한 데다 적을 유인해 기습 공격하도록 작전을 세운 권영회 공이 크다. 권영회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판결문이 당시를 이해하게 한다.

"제1. 피고(권영회)는 융희 2년 7월 26일(음력 6월 28일)에 폭도 수괴 심남일(沈南一)이가 총 약 60정을 휴대한 도당 약 60~7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모사(謀士)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0월(음력 9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전라남도 영광·강진·장흥·남평 등 각 군내에서 군대·헌병대·순사대의 진무(鎭撫)에 대하여 5회에 걸쳐서 반항하여 위 수괴 심남일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1908년 7월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이 부대를 결성할 때 '모사', 곧 작전참모의 역할을 맡아 심남일을 도와 10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영광, 강진, 장흥,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권영회가 태어난 남평군 봉황면 욱곡리 마을 입구.

그런데 권영회는 그해 10월 무렵 조경환 부대로 옮겨 같은 해 12월까지 '모사'를 맡았음을 다음 판결문은 말하고 있다.

"제2. 피고는 동년 10월경(음력 9월경)에 폭도 수괴 조경환이가 총 약 1백여 정을 휴대한 도당 약 1백여 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모사(謀事)라는 명목의 책임을 맡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함평·광주 등 각 군내에서 헌병의 진무에 대해서 4회에 걸쳐서 반항하여 위 수괴 조경환의 폭동행위를 방조하였고,"

"제3. 피고는 동년 12월경(음력 11월경)에 폭도 수괴 박민홍(朴珉洪)이가 총 약 4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50명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하여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책임을 지고 위 도당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 3년 3월경(음력 2월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하여 동도 나주·남평 등 각 군내에서 일본군대의 진무에 대항하여 2회에 걸친 위 수괴 박민홍의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고,"

권영회가 같은해 12월 박민홍의 참모장이 돼 이듬해 3월까지 작전참모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나와 있다.

판결문을 통해 권영회가 작전 수행의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권영회가 심남일, 조경환, 박민홍 등 주요 의병부대를 옮겨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러 의병부대가 각기 독립된 부대를 바탕으로 연합의진을 구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 권영회가 이들 의진을 옮겨 다니며 연합작전을 지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권영회가 의병부대를 오가며 연합작전으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지략을 높이 평가해 모사장직을 신설한 심남일 의병장의 탁월한 지휘력이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어나갔고, 강현수(무경)는 풍운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아갔다"는 동요는 변화무쌍한 작전을 구사한 호남의소의 모습을 말한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권영회는 중과부적으로 체포됐다. 1910년 7월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애국장을 추서했으나 그의 공적으로 볼 때는 독립장 이상은 능히 된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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